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페이스북을 통해 한 친구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에 있었던 일인데, 한 그리스도인이 질문을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가르침이 너무 싫다. 타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법륜스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니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 겸손, 자비, 온유 등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산다면 그것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너머의 진리가 같다면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좌중은 그 말에 환호하였다는 글이었습니다. 저의 친구는 그 글에 공감하며 그것을 공유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이 왜 불교인에게 그러한 것을 물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일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베드로전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산돌”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돌’은 살아있다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살아있는 돌”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1장에서는 “산 소망”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항상 있고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산돌”은 길거리에 있는 잡다한 돌 중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 “모퉁이 돌”이라고 했습니다(행 4:11). 건축하는데 사용하는 돌로서 모퉁이 돌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집을 짓기 전에 평평한 돌을 먼저 구했습니다. 양 벽면이 맞닿는 곳에 모퉁이 돌을 두고 그것을 초석으로 해서 다른 벽돌을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에 다라 건물의 각도와 균형, 다른 수많은 돌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건물을 지을 때 건축가들이 모퉁이 돌을 선정하는데 가장 고심했다고 합니다. 건축물의 기준이 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살아있는 모퉁이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들이 가진 전통과 교황이 기준이 됩니다. 몰몬교에서는 몰몬경이나 조셉 스미스 같은 사람이 기준이 되고, 불교도 불경이나 부처가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는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무엇이 유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 계산하면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이 모퉁이 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사랑, 온유, 겸손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고 가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의 메시지의 핵심은, 자신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가진 모든 권리, 기준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옳다 하시는 것이 옳고, 예수님이 가치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 그것을 제안하신 것입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시간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나를 따를 때 생명이 있고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한다면 저를 따르고 여러분의 인생을 저에게 걸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럴 만한 매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외모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고(사 53:2,3), 예수님의 출신 역시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사회적 위치는,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세리도 어떤 정치적인 지도층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카리스마는 어떻습니까. 강인함과 담대함보다는 온유와 겸손으로 일관된 모습이었고, 로마 군사들 앞에서 도살장에 끌러가는 어린양처럼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였고, 그분의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삶의 기준을 버리고 나를 섬기라’고 한다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빵을 주었을 때는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어려운 말씀을 하실 때면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병 고침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좇으라고 할 때는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자신들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지만, 힘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랑하며 사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 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도와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더라도 그분을 모퉁이 돌로 삼지 않고, 그분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버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7,8절). 예수님을 기준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그분이 모퉁이 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모퉁이 돌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솔로몬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고 여자도 많았으며 뛰어난 지혜로 수많은 책을 썼던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쓴 전도서의 끝에서 그는,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전 12:13).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욥 38:4-6).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 따라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즉 아무 의미 없고 가치 없다고 말합니다. 기준점을 잃은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모퉁이로 삼지 않은 모든 삶이 쓸데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을 모퉁이 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기에 불편하지만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모퉁이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삼으신 분이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이 말씀 앞에서 예수님은, ‘나보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나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보다, 나아가 내 목숨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모퉁이 돌로 삼은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하나님이 그분을 택하시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만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에서 “나아간다”는 말은, 이미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친밀한 연합 관계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자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절). 우리를 “신령한 집”이 되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으며 완벽하게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신령한 집은 ‘성전’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전인 이유는 거룩한 벽돌을 사용하고 멋진 색을 칠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분이 거하시기 때문에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자는 하나님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우리는 사회 봉사를 하기 위해 어떤 공동체로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통해 진리를 선포하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마음의 욕심에 따라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살아가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완벽하게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능력과 유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으셨기에 놓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혜, 겸손, 온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을 옷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우리의 제사장이 유사한 점은,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 제사 드리기에 앞서 거룩하게 하신 것, 거룩한 옷을 입혀주신 것과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신 것, 그리고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물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절). 우리 역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완벽하게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두려운 것은 내 삶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예물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이런 악한 나를 받으실까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절). 우리의 삶은 연약할 때가 있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삶을 예물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온전히 의로우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시고 우리 삶의 기준이 되셔서 우리의 삶이 완벽하게 의미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반드시 그리스도여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만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예수님 없이 우리의 삶은 헛되고 헛되고 헛됩니다.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의미와 가치를 찾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예물이 된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바꾸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날마다 예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