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울, 빌립보에 이르다
본문 : 사도행전 16:11-40
설교자 : 조 정 의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오늘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교회를 세우기까지 있었던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빌립보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들과, 빌립보의 첫 결실인 루디아와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가족들이 구원받는 사건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떠한 환경이 사도 바울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과 ‘그 환경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는가’에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어떻게 빌립보 교회에 역사하셨는가를 배우기 원합니다.

해외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현지 음식, 날씨, 기후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선교팀 자체의 존립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물질적, 영적 후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교팀 내의 ‘팀워크’이고, 마지막으로 선교팀의 목표와 계획, 즉 ‘비전’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사도 바울의 경우로 생각해볼 때, 그의 1차 전도 여행과 2차 전도 여행의 모습은 참 다릅니다.

1차 전도 여행은 안디옥 교회 장로들이 기도할 때 성령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한 후 바울과 바나바에게 안수하고 선교지로 보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든든한 물질적, 영적 후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팀워크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을 사도들과 제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사도들을 옥에 가두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교회는 시리아 지역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헬라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바나바를 보냈고, 그곳에 간 바나바는 함께 성도들을 양육할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선택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한 마음으로 일했던 동역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팀워크가 좋았던 것입니다. 선교 여행의 계획과 목표는 어떠했을까요? 그들의 목표대로 소아시아 지역(루스드라, 더베, 이고니온, 시리아 안디옥 등)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성공하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2차 선교여행은 어땠을까요?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행 15:36). 그들의 시작은 1차 여행에 비해 단순합니다. 교회의 후원이나 장로들의 금식기도, 안수 등이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게다가 팀워크에도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37-39). 그들의 갈등은 선교 여행을 함께 할 수 없을 정도의 다툼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여러 지역을 다닐 계획을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아시아의 경계지역으로,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아시아 지역을 보며 그곳에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16장 말씀을 보면 “성령이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합니다.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막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사도 바울은 북동쪽의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지만 역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7)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계획이 다 틀어진 것입니다. 후원도 대단하지 않고 팀워크도 와해되고, 목표와 계획도 차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려고 할 때 처한 환경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여행을 막으시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그만 두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그와 함께 했던 실라는 누구일까요?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안디옥 교회 내에 문제가 생깁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에 대해 사도들에게 물어보라고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베드로는, 구원이 믿음으로 되는 것이고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답합니다. 이것을 다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전하면 그들이 평소 주장하던 것과 같기에 믿지 않을 수 있으니,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두 지도자를 덧붙여 보냅니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실라’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바울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형제들에게 은혜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15:40). 사도 바울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환경이 막혔을 때에도 끝까지 주어진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7절의 “애쓰되”라는 표현). 남쪽이 막히면 북으로 그곳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15:41),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16:4). 사도 바울이 환경과 관계없이 복음을 들고 성실히 그것을 전파 했을 때 그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들을 굳건히 세우시고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들을 굳건히 하려는 사도 바울의 계획에 또다른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6:9-10). 당시 사도 바울의 머리속에는 유럽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을 통해 유럽으로 갈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통해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과 고린도, 에베소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유럽 전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복음의 사명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럽 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새롭고 놀라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팀원인 실라, 누가, 디모데(16:5)와 함께 빌립보 지역에 가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라는 섬을 거쳐 네압볼리에 이르고, 그곳에서 에그나티아로(로마가 세운 860km의 대로)를 따라 16km를 걸어 빌립보에 이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으로, 중앙에 대로가 지나고 광장, 재판소, 감옥이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인구 2~3천 정도의 작은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본래 이곳의 지명은, 크레니데스(작은 샘들)라는 이름이었는데 이곳을 점령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붙여 ‘빌립보’라고 지은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팀은 안식일에 복음을 전하러 나갑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회당에 모이는 안식일이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저 강가에 기도하러 모인 여자들이 전부였습니다. 참 힘이 빠지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도 잘못된 것이 아니었나 싶을 만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자든 남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16:13). 그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16:14). 두아디라 출신으로 그곳에서 만든 옷감을 가져와 빌립보 지역에서 장사를 하는 여자였습니다. 성경은 루디아가 이미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러 강가에 나왔고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셨고 그 여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16:15). 빌립보의 첫 결실이 맺어진 것입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줍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처음부터 그녀는 복음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 교회의 초대 예배당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다시 사도 바울의 선교팀이(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었습니다. 여기서 “여종”이라는 단어는 아주 어린 여자아이를 가리킵니다. 그녀는 안팎으로 심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날마다 귀신, 악한 영에게 시달렸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옷을 찢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너무 괴로워 차라리 죽겠다고 목숨을 끊으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 아이를 착취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악한 사람들이 이 여자아이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는 사도 바울을 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 지르며 말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인데 무엇이 문제일까요? 마술과 마법을 행하는 악한 신이 들린 여자가 복음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과 동일시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은 복음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방법으로, 복음의 가치를 떨어트리려는 것입니다. 여자 계속 따라와서 괴롭게 하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6:18)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귀신은 즉각 반응합니다. 여자 아이가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자 그것에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종의 주인들이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16:19). 주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여자 아이를 데리고 편하게 돈을 벌었는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잡아다가 관리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21). 그들은 자신들의 수익이 끊어져 화가 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인데 감히 로마인에게 이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사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빌립보 사람들은 자신들이 로마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당시 빌립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잡은 황제는 이 지역에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공물과 세금에서 면제되었으며, 황제에게까지 항소할 수 있는 처벌 금지법도 있었습니다. 이곳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곳으로서 로마 문화가 가득했던 곳입니다. 그러니 이 도시의 사람들이 “우리 로마 시민에게 감히 유대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상관들이 데리고 간 사람들로 바울과 실라만 등장합니다(16:19). 그렇다면 같은 선교팀이었던 누가와 디모데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견해 중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백인스러웠던 누가와 디모데(혼혈)보다는 중동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는 바울과 실라를 잡아 데려갔으리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습니다. 태형은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데, 로마 시민이 아닌 경우는 나무 몽둥이 위에 가죽끈과 날카로운 쇠붙이를 달아서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은 40대를 넘지 않게 때리는 것으로 제한이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집정관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맞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런 채찍에 맞았을 것입니다. 23절에 “많이 친 후에”라는 말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혹독하게 맞은 후에”입니다. 채찍에 달려있는 날카로운 금속이 등이나 어깨에 막혔다가 당겨지며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매를 맞은 후에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16:24)습니다. 차꼬는 나무로 만들어진 수갑으로 쇠고랑에 걸어서 벽이나 바닥에 고정시킨 것이었습니다. 벽에 고정되었기에 아마도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벽에 붙은 채로 밤새 서 있었을 것입니다. 등에 채찍으로 인한 상처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밤새 고통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오늘 내가 무엇을 했던가’라고 생각했을까요? ‘그저 불쌍한 여자 아이의 영혼을 구했고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16:25). 감옥에 처음 들어가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과 앞으로 어떤 고통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마련입니다. 그 감옥의 다른 죄수들도 바울과 실라가 그런 두려움에 울부짖으리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놀라운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며 기도하지 않았을까요(2:41). 주님도 나처럼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고통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 나의 반석, 나의 방패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할까’라는 시편의 노래를 했을 것입니다. 캄캄하고 조용한 감옥에서 모든 죄수들이 그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16:26).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기적은 아닙니다. 빌립보 지역은 원래 지진이 잦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타이밍만은 참 놀랍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대피요령은 책상 아래 숨거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벽에 붙어 꼼짝달싹 못하는 죄수가 숨을 데가 어디 있고 또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16:27). 목숨을 끊으려는 간수를 보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16:28). 감옥에 갇혔는데 갑자기 수갑이 풀리고 문이 열린다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고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드렸던 찬송과 간증의 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죄수들이 알았던 것입니다. 간수는 등불을 들고 바울과 실라 앞에서 얘기할 때 두려움에 떨며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라고 묻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그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수가 엎드렸고 구원을 알려달라고 했고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간수에게 한 말이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즉, 이것이 ‘주 예수를 믿으면 가족이 구원을 받는다’는 절대적인 약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딤전 2:4)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간수와 가족들이 모두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수와 가족들은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씻기고, 바울과 실라는 그들에게 죄를 씻기는 세례를 줍니다(33). 참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4).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그들이 처한 참혹하고도 악랄한 환경에서도 기쁨의 찬송을 불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찬송을 온 집안의 기쁨의 찬송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튿날 상관은 바울과 실라가 조용히 나가기를 바랐습니다(35). 이 일을 별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끝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이제야 꺼냅니다. 맞기 전에 밝혔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37). 로마 시민은 정식 재판을 받지 않고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이것에 대해 내가 가만있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왜 이제야 그 사실을 밝힌 것일까요?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복음을 접하고 구원받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과 같이 고소를 당해 이러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는 루디아의 집에 돌아와서 남아있던 누가와 디모데를 만나고, 루디아의 가족들과 간수의 가족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돌아갑니다(40). 위로를 받아야 할 사도 바울이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3차 전도 여행에서 두 번이나 이 지역을 방문하여 여러 차례 위로하고 감사합니다. 로마 시민권보다 하늘의 시민권이 귀함을 강조했을 것이고, 감옥에 갇혀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끝까지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나는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5-10년 뒤에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이곳을 기억하면서 ‘빌립보서’를 쓰게 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0:26).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든지 상관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해외에 있든 한국에 있든, 사도 시대이든 지금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했던 것처럼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확장시키시고 믿는 자들을 더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