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과 양심
본문 : 사도행전 24장
설교자 : 조정의
복음을 살아내는 건 쉽지 않다. 복음 자체에 대한 비방도 문제지만, 복음이 일깨운 양심(선한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다. 선한 양심으로 남을 속일 수 있나? 갑질 할 수 있나? 험담이나 이간질할 수 있나? 화를 쏟아낼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물론 내 육신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복음으로 깨어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어 한다. 복음이 내 안에 일으킨 역사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이처럼 복음은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만든다. 그런데 신자 중에는 선한 양심을 따라 살지 않는 자가 더러 있다.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사람 대하는 게 다르고, 사람마다 대하는 게 다르다. 양심이 살아 있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면? 끔찍하고 가증스럽다(계 3:16).
그래서 베드로는 신자에게 명령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선한 양심을 따라 살면 우리 양심을 새롭게 만든 복음의 능력이 입증된다. 신자의 선행이 복음을 비방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다. 복음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본문은 바로 이 진리를 보여준다. 바울은 유창하고 능력 있는 변호사의 비방을 단번에 잠재웠다.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서? 복음에 관한 풍부한 지식으로? 아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기 때문이다(16절).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말뿐 아니라 삶으로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기억하라, 양심을 따라 살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1. 복음에 대한 비방(1-9절)
바울은 천부장이 명령한 대로 대규모 군병의 보호 아래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무사히 호송됐다(23:31-35). 가이사랴 총독 벨릭스는 헤롯 궁에 바울을 가두고 그를 고발할 사람들이 오면 재판하려 했는데, 닷새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 총독 앞에 섰다(1절).
더둘로는 변호사(레토로스, 웅변가)답게 말의 힘이 대단했다. 먼저, 아부(3절). 그리고 세련된 화법(4절). 이어서 과장과 경멸(5절, 나사렛 이단-듣보잡 이단). 절정은 모함(6절, 성전-로마 관리의 아킬레스건). 증인이나 증거는? 없다. 벨릭스가 직접 심문하여 밝혀내면 알 거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8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비방에 따라온 유대인 최고 지도자들도 힘을 보탰다(9절).
이들이 바울을 비방한 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믿는 복음 때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쌍히 여겨 복음을 전한 그 선행 때문에 바울을 욕한 것이다. 우리도 복음 때문에 언제든지 비방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무엇으로 그 비방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냐는 것이다.
2. 비방을 이긴 복음(10-21절)
총독이 머리로 표시하여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줬다(10절). 바울은 변호사 더둘로와 달리 짧고 정중한 인사로 변명을 시작했다(10절). 바울의 변명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나는 그들이 비방한 일을 하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 없었다(11절, 열이틀). 증인과 증거가 전무하다(12-13절).
둘째, 나는 그들이 말한 이단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14절)는 ‘1)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14절) 2)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고(14절) 3)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갖는 도’이다(15절). 바울이 가진 소망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단 12:2-3).
셋째(절정), 내 양심적인 삶이 증명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바울이 믿는 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16절). 바울은 복음을 인하여 범사에 항상 양심을 따라 살았다(오늘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23:1). 바울은 단지 말로만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한 게 아니다. 실제로 그는 양심을 따라 살았다. 17-21절까지 바울이 내민 삶의 증거를 보라.
먼저, 그가 예루살렘에 여러 해 만에 온 건 자기 민족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17절, 갈 2:1; 롬 15:25-28). 그는 선한 양심에 따라 나실인 결례를 행하는 이들의 제물 비용을 대신 냈고, 그들과 함께 예식을 행했다(18절). 성전에 있는 동안 그 어떤 모임을 만들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18절).
정작 소동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18절) 바울을 비방하며 생긴 것인데, 정작 그들은 바울을 정식으로 고발하는 이 재판장엔 오지도 않았다(19절).
지금 재판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며칠 전 공회에서 일어난 일을 직접 보고 들은 자들이다. 공회에서 바울은 양심껏 자신이 믿는 것을 외쳤다. “내가 죽은 자의 부활(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21절, 23:6). 그 말을 듣고 바리새인 중에서 서기관 몇이 일어나 말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23:9).
만일 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담대하게 변명할 수 있었을까? 어떤 이들 앞에선 두려워서 약한 양심을 따라 행하고, 어떤 이들 앞에선 무시하여 더러운 양심을 따라 행하고.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양심을 버리면 믿음도 잃는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했다.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결과,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기 때문이다(딤전 1:19).
당신의 양심은 살아있는가? 살아 있는 양심은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는 양심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에 대한 일이든 사람에 대한 일이든 변치 않는 양심이 살아있는 양심이다. 더러운 양심은 누가 볼 때와 보지 않을 때가 확연히 다르다. 깨끗한 양심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같다. 왜?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면 그들을 보상/심판하실 하나님이 항상 내 앞에 계심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 주석가는 ‘양심을 따라 사는 자’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세에 대한 믿음 때문에 현세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더욱 힘쓰는 자들.”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자는 양심을 따라 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 자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복음이 일깨운 양심대로 사는 게 정상이다. 더럽고 약한 양심을 가진 자는 자기 눈을 가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선한 양심을 지킨 자는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시편 139편 1-4, 7-10, 23-24절.
만일 당신이 더럽고 약해진 양심을 가졌다면, 당장 이렇게 구해야 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하나님은 말씀으로 양심을 찌르신다.
3. 양심을 찌른 복음(22-27절)
벨릭스는 바울이 말한 ‘도’인 복음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22절).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를 통해서 익히 들었을 것이다(24절). 벨릭스는 바울이 믿는 복음과 살아낸 복음에 문제가 없단 걸 알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으려고 또, 바울에게 뇌물을 받을까 하여(26절) 천부장 루시아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핑계로 암플리우스를(마지막 판결을 정식으로 연기, 보류하는 판결) 내렸다(22절). 그렇게 잠시 머물 거로 생각했던 가이사랴 감옥 생활이 이태(27절, 2년)가 지났다.
바울은 결박됐지만 조금은 자유로웠다. 원하면 친구들이 바울을 돌보러 감옥에 올 수 있었다(23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울을 원하는 특별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였다(24절). 그들은 자주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26절).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24절을 보면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말했다.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이 강론한 복음에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 들어있었다(25절).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으면, 자기 삶을 절제하지 않으면, 장차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벨릭스는 황실 노예에서 총독까지 급격한 승진을 하면서 유대인을 과잉진압하고 고위층과 정략적인 관계를 맺는 등 불의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았다. 드루실라도 원래 남편 있던 여잔데 마술사로 속여 자기 아내로 만든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 2세 여동생이니까. 드루실라도 장차 오는 심판 앞에 자유롭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려워했다(25절). 머리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찔림을 받았다. 하지만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미뤘다(“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25절). 양심은 계속 찔림을 받았지만 그들은 계속 미뤘다.
찰스 스윈돌은 대장 사탄과 부하 귀신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모든 민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 헛소문을 만들라’는 명령에 첫째 귀신이 ‘천국이 없다고 말하겠다’고 했다. 사탄은 ‘그 방법은 안 통한다. 성경에 이미 천국이 있다고 나와 있다’라고 했다. 둘째 귀신이 ‘그럼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방법도 안 통한다. 최소한 양심이 있어서 삶에 상응하는 심판이 있다는 걸 다 안다’고 말했다. 셋째 귀신이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지옥이나 천국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벨릭스와 두르실라가 이 헛소문의 피해자다. 그들만이 아니다. 많은 불신자와 신자가 하나님 말씀으로 양심의 찔림을 받지만, 양심을 따라 행하지 않고 미룬다. 그렇게 미루는 삶을 지속하면 양심은 마비된다(둔감해짐, 화인 맞음, 딤전 4:2).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2장에서 오순절에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과 7장에서 스데반이 전한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이다. 전자는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었다(2:37). 결국 말씀을 ‘받고’ 제자가 됐다(2:41). 반면 후자는 똑같이 복음을 들고 마음에 찔렸지만, 복음을 거부하고 분노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7:54, 59). 복음을 듣고 깨어진 양심을 가진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거부하여 마비된 양심을 가진 이들은 복음을 증오한다.
신자도 그렇다. 다윗처럼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양심을 살피고 시험하고 단련하는 사람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산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 양심을 살피고 시험하실 때 이를 거부하거나 그분의 단련하심을 계속해서 미루는 사람은 점점 더럽고 연약하고 둔감한 양심을 갖게 된다.
결국, 말씀에 양심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더욱 예민하고 깨끗하고 살아있는 양심을 가진 자가 말씀에 굴복하고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자를 통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능력의 근원인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것이다.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살아있는 양심을 따라 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냉장고는 주지 않지만, 그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의의 면류관”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당신에게 예비되었다(딤후 4:8). 그러니 양심을 따라 살자.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자. 그것이 복음을 아는 자가 살아내야 할 합당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