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실패를 대하는 자세

본문 :  로마서 11장 13-24절

설교자 : 이병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촌이 대출을 받아 땅을 샀는데 땅값이 폭락해서 망하면 어떨까요?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갑니다. 이런 말들은 약간 비꼬면서 교훈을 주기 위해 과장해서 하는 말들이지만 우리는 충분히 사람에게 있는 죄의 성품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을 봤을 때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나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실패한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높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그러한 일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듣고 있는 로마 성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로마 교회의 대다수는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들었을 때 그들은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거나 실패한 이스라엘보다 그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을 예방하기 위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이스라엘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특정한 민족이나 특정한 공동체로 제한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만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만 받을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이 경고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명령을 중심으로 실패를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나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패를 바라보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자신의 경고가 오해 없이 전달되도록 먼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실을 다시 말합니다.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사명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충성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헌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생각하면 오해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 수고하는 바울, 유대인인 바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며 유대인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은 포기하고 이방인에게만 집중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수고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유대인을 포기하거나 그들의 구원을 위한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 수고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 골육, 이스라엘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만들어서 다만 “얼마”라도, 단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 싶은 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지만 실패와 함께 그 후에 있을 회복, 미래의 밝은 전망을 함께 말합니다.

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주어가 되는 하나님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라는 놀라운 일이 되었는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이스라엘의 회복, 그 충만함에 이른 이스라엘의 모습이 죽은 자의 부활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11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셨냐고 질문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기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두 경우에서 버린다고 했을 때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문맥에서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1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총체적인 이스라엘, 그들 모두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또한 영구적인 버림이 아니기에 그 기간에 있어서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족해서 완전히 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시적인 징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15절에서의 버리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을 거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루시기 위해서 그들 대다수를 징계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어 세상의 화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5절은 앞서 언급했던 12절을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과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경고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합니다. 먼저는 그 비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제되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바울이 쌍으로 짝지어서 말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 그리고 “뿌리”와 “가지”는 어떤 것의 ‘일부’와 ‘전체’를 말합니다. 일부에게 있는 거룩함이 전체의 거룩함으로 확장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구별된 첫 열매는 일부이지만 그 수확한 곡식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 모든 열매도 하나님께 구별된 것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뿌리가 거룩하면 그 나무의 전체라 할 수 있는 가지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부와 전체가 비유하는 실제 대상이 무엇일까요? 일부가 비유하는 대상에 대해서 몇몇 견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견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28절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에 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나오기에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이스라엘의 조상, 구약의 족장들을 택하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무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뿌리에서 가지가 자라나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성장했습니다. 그런 나무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이스라엘은 감람나무로 설명이 됩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과실나무였습니다. 구약에서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좀 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하면 올리브나무입니다. 그리고 감람나무와 대조되는 돌감람나무는 야생올리브나무입니다.

농부가 감람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감람나무가 농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랍니다. 그래서 농부는 가지들을 꺾고 대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입니다. 나무를 심은 주인은 그 뜻대로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참감람나무 가지를 꺾는 일과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일입니다.

이 비유에서 참감람나무 가지는 복음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말하고 돌감람나무의 가지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함으로 그 가지가 꺾이게 되었고 대신에 이방인이 접붙임을 받아서 뿌리로부터 그 양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조상에게 주어진 언약 바깥에 있던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 자체는 일반적인 상식에 반하는 일입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를 나무에 접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이 비유에서는 오히려 열매를 잘 맺는 않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바울이 수목 재배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참 저자이신 성령님은 실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유를 이해할 때는 비유가 말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유 대상의 모든 점을 세세하게 빗대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유를 우리 상황에 맞게 뜯어 맞추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비유가 강조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열매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지 주인이 원가지를 꺾고 다른 가지를 접붙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을 잠시 제쳐두고 이방인을 넣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지가 더 낫다거나 더 쓸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드디어 첫 번째 경고의 명령을 전합니다.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첫 번째 경고는 자랑하지 말라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꺾인 가지들을 보며 자기 자랑을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이 복음을 거절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우쭐하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실패한 그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불행, 실패를 보며 우리는 나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랑은 합당치 않습니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자랑할 근거도 없고 자랑할 내용도 없습니다.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네가 지금 어디에 붙어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네 노력으로 네가 잘나서 지금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리가 아닙니다. 스스로 뭔가 된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때마다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난 뿌리가 아니야!’ 뿌리가 없는 내가 지금 이렇게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바울의 경고에 대해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가지들은 나를 위해 꺾인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번째 경고의 명령을 전합니다.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바울의 대답은 옳도다 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으니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나를 위한 일로만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있던 가지를 꺾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단지 나에게만 맞추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택배기사님이 나에게 택배를 배달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저 택배기사는 나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그 상황만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방인의 구원으로만 생각하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크고 넓고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합니다. 두 번째 명령,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그분을 향한 경외심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게 되고 나 중심적이 되어서 이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높아지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원 가지, 원래부터 그 나무에 붙어있었던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런데 접붙임을 받은 가지에 대해서 다르게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해서도 그 뜻에 맞지 않는다면 꺾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보면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고의 말씀이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 걸까요?

그의 대답입니다.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인자하신 분이지만 또한 한없이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스라엘처럼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찍히는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를 중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며 믿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 인자하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머물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두 명령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십시오. 저는 두 명령을 하나로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겸손하십시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울의 전하는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합당한 자세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며 그분을 경외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은 그에 따른 보응을 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23). 하나님이 그 뜻대로 꺾으시고 접붙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그 뜻대로 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 사람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연중에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받은 은혜를 근거로 높은 마음을 품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실패가 나를 교만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야! 난 저 사람보다 겸손하고 마음이 좋으니까 구원을 받은 거야! 하나님을 믿는 나는 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서, 더 괜찮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만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발견하시고 그것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은혜로 받은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며 계속해서 겸손함으로 그 인자하심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며 우리에게 합당한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