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보이려는 나, 보시는 하나님
본문: 마태복음 6장 1~36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 신앙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 어떻게 보이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을 우리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습니다. 자꾸 나를 보이려 하고, 그것을 제대로 봐주지 않을 때 실망합니다. 분노합니다. 남들이 더 잘 인정해주는 사람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또, 남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진짜 내 모습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남에게 보이려 할까요? 왜 이것이 문제가 될까요? 어떻게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마태복음 6장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자꾸 사람을 믿고 의지하려는 우리 마음의 핸들을 똑바로 잡아 하나님만 향하여 달려가기 원합니다.
1. 우리는 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가?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을 멀리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하십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6:1)
사람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사람 앞에서 의로운 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조심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뒤이어 “의를 행하는 것”의 구체적인 예시가 나옵니다. 2절을 보시면, 구제, 즉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2절)
이 사람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회당이나 큰 거리에서 다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자기를 주목하도록 나팔을 불고 구제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5절은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절)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회당,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틀림없이 큰 목소리로 기도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6절은 금식할 때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16절)
이들은 일부로 슬픈 표정을 짓고 얼굴을 흉하게 하고, 씻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은 채, 금식을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처럼 금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의 신앙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 반대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신앙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보다 사람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혹은 “하나님이 뭐라고 생각하시든 사람이 인정하는 신앙이 더 가치 있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사람의 칭찬이 필요하다”라고 말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까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고 기대하는 이유, 진짜 동기가 무엇일까요? 방금 살펴본 구절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은 진실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2절). 또한 5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 말은 자기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이미 얻었다는 말입니다. 원하던 욕구가 사람들을 통해 이미 충족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지 그 깊은 동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수고에 대한 결실 혹은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우리는 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한 수고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 욕구가 충족될 때 우리 영혼이 깊은 만족과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욕구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많은 수고를 한 뒤에 가을에 결실을 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처럼, 내가 한 의로운 행위가 헛되지 않고 결실을 보기 원하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를 사람이 채워주길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대한 보상을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언제 주실지 모르는 보상보다는 당장 내 눈 앞에서 보상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결국 욕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욕구를 엉뚱한 곳에서 충족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가는데 어떤 성도님이 와서 “오늘 설교 정말 좋았어요. 정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렇게 칭찬을 한다면 제 기분이 어떨까요? 아마 기쁠 것입니다. 내 수고가 헛되지 않고 누군가의 유익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격려를 받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이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 수고에 대한 보상을 계속해서 사람에게 받으려 할 때 일어납니다.
사실 설교자로서 말씀을 들은 사람의 삶에서 그 말씀이 열매를 맺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이 수고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것만큼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금방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건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만일 제가 그 욕구를 사람에게서 채우려고 한다면, 설교 후 아무도 설교에 대해 알아주지 않을 때 실망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은 시기와 질투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 후 누군가가 와서 저에게 “지난주 수요일 그 형제 설교는 진짜 좋았는데…”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우리 교회에 은사 있는 설교자가 많아 참 좋다’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왜 나의 수고는 알아주지 않고 저 사람의 수고만 알아주는 거야?’라는 시기와 질투가 생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상을 받고 싶고,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의 문제는 우리 신앙생활에 언제 어디서나 스며들 수 있는 문제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 그 수고에 대해 자녀가 인정해주고 보상해주길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결혼하고 나서 그런 문제를 많이 겪기도 하지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하면서요.
특별히 직장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하듯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고 일한다면, 사람을 보고 일하는 다른 사람과 큰 차이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어떻게든 자기가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약자에겐 강하게, 강자에겐 약하게,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일만 하려고 하고, 이득이 되는 인간관계만 신경 쓰고…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특송을 하거나, 애찬 당번을 하거나, 교회를 청소하거나, 교회 장비를 수리하거나, 성도를 돕거나, 심방하거나, 교회 학교 교사로 섬기거나, 아이돌봄, 실버학교 자원봉사를 하거나, 운행하거나, 만찬 예배에 참여하거나, 저처럼 설교를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에 있어 우리는 사람의 칭찬, 사람이 주는 상, 사람이 주는 영광을 기대하고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더 이상 봉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계신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엉뚱한 곳에서 우리의 욕구를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헌신과 순종에 대한 보상을 기대합니다. 그것을 바라는 순수한 욕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결실을 거두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결실을 사람에게서 얻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욕구를 사람을 통해 채우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합니다(갈 6:9).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바라본다면 선을 행하면서 낙심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결실을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면, 분명히 낙심하고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2.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정확히 왜 문제일까요?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일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절)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왜 문제인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즉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땅에서 사람들에게 상을 받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부모가 자녀에게 ‘너 지금 사탕 먹으면 이따 사탕 없다’ 말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 그래서 사람의 칭찬을 받은 일에 대해서 나중에 하나님의 상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영적으로 고상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 참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중에 받을 상을 쌓아두며 살겠지만, 연약한 사람은 꼭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상을 좀 덜 받더라도 여기서 인정과 칭찬을 좀 누려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단지 선택의 문제일까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사람에게 상을 받는 게 손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사람에게 받지 말고 하늘에서 하나님께 받으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어떤 상이 더 큰지 계산해볼 문제일까요?
곰곰이 본문을 묵상해보면,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뒤이어 말씀하신 구제, 기도, 금식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의 칭찬과 하나님의 칭찬 중 선택하거나 계산할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로운 일, 선한 일의 참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의로운 일을 사람의 칭찬을 위해 행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시선을 사람에게서 자꾸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만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3-4절)
누가 은밀한 중에 보고계십니까? 너의 아버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위해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문을 닫힌 골방,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누가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십니까? 네 아버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7-18절)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아무도 금식하는지 알 수 없게 하지만, 누가 보고 계십니까? 은밀한 중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분에게 보이게 하려고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땅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을 바라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보이는 곳에서 나의 일부만 보고 나를 쉽게 인정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나의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을 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보이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진짜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우리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들을 가리켜 모두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것이 외식일까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하는 구제, 금식, 기도를 하면서 실제 그들의 마음으로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진짜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이 그토록 미워하신 외식이기 때문입니다(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자여!). 그래서 이렇게까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며 반복적으로 경고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히 10:24). 격려를 받을수록 우리는 더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잘 섬기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동시에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롬 14:18).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칭찬하고 격려하면서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고 사람에게서 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일을 행하고 자꾸 사람의 반응을 기대한다면,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 실망한다면,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진정 어디에 있는지, 당신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당신이 사람을 중히 여긴다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이 사람의 상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상은 미워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마음이 섬기는 분은 진정 누구입니까?
3. 어떻게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선한 일의 보상 혹은 결실을 얻기 원하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사람에게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게 심각한 문제인가요? 신앙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바꾸는 외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말 한 마디에 크게 요동치는 우리 마음, 상대방의 눈빛과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 마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한 말과 행동을 어떻게 볼까? 심히 염려하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오직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평온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사실 이것이 제가 매순간 싸우고 있는 문제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깊이 느끼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이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결책이 어디에 있을까요?마태복음 6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 눈을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둘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도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 자세히 다룰 수 없지만,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13절까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온통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만드는 기도입니다.
먼저, 처음과 끝이 모두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고백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말입니다(고전 10:31).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시작과 끝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면, 우리는 우리 시선을 사람에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은 내가 높아지는 게 아닙니다. 내 평판이 좋아지고, 내 인기가 높아지고,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 사고를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로 바꿔줍니다.
어떤 일을 행하고 나서 사람에게서 아무런 인정이나 칭찬을 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조급해지고 눈치를 보게 되고, 괜한 염려나 불안한 마음이 엄습할 때, 이 기도를 읊조리십시오. “하나님, 제가 진정 바라는 것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게 해주십시오.”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빌 1:20). 이런 기도는 우리 마음을 사람의 반응에 초연해지도록 만듭니다.
이어서 11절을 보십시오. 우리 육체의 필요에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매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비롯하여 공기, 호흡, 건강, 에너지,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누구에게 달라고 구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십니다(32절).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실 것입니다(33절).
그러므로 사람에게 뭔가 얻고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 기도는 사람에 대한 물질적 기대, 거기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유약한 마음을 해결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12-13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영적 필요에 대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12-13절)
누가 우리의 죄책감을 해결해주실까요? 누가 우리를 모든 시험에서 건지실까요? 누가 우리를 온갖 악으로부터 보호하실까요? 우리의 하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던 마음, 그 외식의 죄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을 미워한 죄, 나보다 더 칭찬받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 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시고, 시험 중에 피할 길을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0:13). 계속해서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탁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만 바라보신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창조하실 것입니다(요 2:24).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보이는 사람에게 집착하게 만들고, 어떻게든 유혹해서 외식의 삶으로 넘어뜨리게 하려는 마귀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는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그리고 넘어질 때,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람은 믿어야 할 존재 아니라,
오직 서로 사랑해야 할 존재라
그러니 믿지 말고 사랑하세요
하나님만 믿고 사랑하세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십시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합시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서로 사랑합시다.
이렇게 살기 위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날마다 읊조리며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훈련을 쉬지 않고 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