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확신에 따라 행하라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6절
설교자: 최종혁

 

 

바울은 자신의 삶의 끝에 이런 고백을 했다.

딤후 4:6-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의 이런 고백이 참 부러울 것이고 나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드는 생각은 바울이니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평생을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고백이고, 나 같은 ‘평시민’은 직장도 있고 하니 노력은 해야겠고 부담은 있지만 바울 같은 고백은 못하겠구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같은 사명을 받았고 그런 면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1절에서 바울이 말한 “이 직분”은 바울에게는 사도의 직분이겠지만, 영광스런 복음은 사도들만 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일꾼들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상관없이 그렇다. 우리 모두가 받은 사명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로서 그리고 교회에 속한 개인으로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살면서 복음 전하는 일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삶을 산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복음 전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같다. 직장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집에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학교에서 길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복음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동기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복음이 어떤 복음으로 나타나는지가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고백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고백이고 해야 할 고백이다.

 

이 일을 하는데 때로 우리는 낙심한다. 그럴 만한 상황들이 있다. 바울의 경우를 지난 주에 살펴봤지만, 그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어려움들을 겪었다. 못 먹고 못 자고 춥고 헐벗었다. 여행 중에 배가 파선하기도 하고 다른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를 경쟁자로 생각한 사람들이 모함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다시 우리로 와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우리도 그런 일들을 만난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낙심할 일들은 여전히 있다. 오늘날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반대에 직면하기도 한다. 진리의 다양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배타적인 사람으로 비난 받기도 한다.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할 때,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사람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나조차도 이렇게 하는게 정말 맞는 걸까하는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내가 굳이 이렇게 살 이유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멈추고 싶고 다른 길을 찾고 싶다.

 

이럴 때 낙심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확신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고난이 필연적이었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영광의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바울을 부르셨다. 그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그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부르시고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영광스러운 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이 직분을 생각할 때 낙심할 수 없다.

 

열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마지막 결과물이 아니다. 단지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길 원하신다.

 

이런 확신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이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어떻게 

다시 한번 이 직분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신을 생각해 보라.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 계획을 이루셨으며 지금 성령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실제로 구원하고 계신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받았고, 우리 전에 그리고 우리 후의 성도들도 그렇게 구원 받는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에 따라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 집을 지을 때 집 주인은 사람을 시켜서 집을 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짓는 사람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대로 집을 지어서는 안된다. 때로 일꾼이 주인보다 실무를 더 잘 알아서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인의 원하는대로 지어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어떻겠는가? 우리가 하나님보다 절대 더 잘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이 유혹처럼 찾아올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신다. 이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 2절,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바울은 매우 담대하게 말한다.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아시고 사람들이 안다는 것이다. 무슨 자신감일까? 다른 것은 없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말을 잘하고 하는데 근거한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능력을 행해서도 아니다. 혹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바울이 참된 사도라고 증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근거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하나님의 참된 일꾼인지를 증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한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먼저 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 이 일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하나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일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이라는 것이다. 즉, 죄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 죄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동반하고 그래서 숨기고 싶은 것이지만, 바울은 특별히 이 표현을 통해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 숨기는 그런 위선적인 죄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역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공격에 대항하고 있다. 바울이 겉으로는 거룩한 사도인 척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렇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더러운 죄를 행하고 있다는 비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특별히 그는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자신이 어떻게 행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에 따라 행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없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그 마음의 동기에 어떤 죄악된 것도 추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동기를 가지고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양심이 증언한다고 말한다.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다음으로는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사기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기를 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대방이 듣기에 좋은 이야기, 듣고 혹할 만한 말을 한다. 듣는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속이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기브온 주민들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낡은 옷에 낡은 신을 신고 해어진 가죽 포도주 부대와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와 마치 자신들이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속였다. 그리고 결국 화친 조약을 맺었다. 목적을 위해 속임으로 행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성도들을 속이는 목회자들도 있다. 더 많은 헌금을 위해 일부러 낡은 옷만 입는 사람들도 있다. 속이는 것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다 주님 영광 위해 하는 일인데 어떠냐’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결과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세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혼잡하게 하다’는 말은 포도주를 파는 사람이 포도주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본래의 것을 변하게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서 본래의 의미가 아닌 것을 마치 본래의 의미인 것처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씀이 2장 17절에도 있다.

고후 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여기서도 동일하게 ‘혼잡하게 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본래의 단어는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는 과거의 약장수일 것이다. 그래서 쉬운 성경은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번역했고 바른 성경은 좀 더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많은 이들”이라고 번역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돈을 얻기 위해, 명예나 평판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바꾸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만큼 추악한 위선은 없다.

 

부끄러운 일은 숨기려 하고 속임으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고 이용하는 방법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 동기가 분명하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 동기이자 목적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일꾼으로 부리려는 자다. 그럼,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은 어떻게 일할까?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바울이 했던 것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했던 일의 방법이자 목적이었다. 영광스러운 직분을 은혜로 받은 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그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놀라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했다.

 

세계 최고의 미술작품이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을 내가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조금만 손을 대면 더 좋아질까? 아니다. 더 나빠질 뿐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가 그러하시다. 영광의 복음이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진리를 진리로서 나타내는 것 뿐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했다. 그의 말로서 진리를 선포했고 그의 삶으로 진리를 살아냈다. 그가 가진 확신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행한 것이다. 확신에 따라 행했다.

 

그가 선포한 진리의 내용은 이렇다.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절)

 

여기서 바울에 대한 궁극적인 공격이 무엇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바울을 공격하던 사람들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전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바꿔서 결국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전파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분의 종으로서 또한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사람들을 섬겼다. 복음을 전했고 복음의 삶을 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춰주셨고, 그는 자신을 통해 그 빛이 최대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또한 비춰지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다른 어떤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이 놀라운 진리가 왜곡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대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그는 낙심하지 않고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나타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의 말로, 그의 삶으로 진리를 나타냈다.

 

 

그럼,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도 바울처럼 복음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복음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느냐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복음의 빛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계신데,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의 삶이 빛을 투과시키는 렌즈라면, 나는 어떤 렌즈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때로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나를 통과하는 빛을 어둡게 만든다. 내 주변 누구도 내가 빛을 비추고 있는지 모를 때도 있다. 구원 받은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때 그렇다. 나조차 빛에 대한 확신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의 다른 빛을 찾기도 한다. 세상의 학문, 심리학,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좇는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성경의 말씀과 다르게 살아간다. 내가 믿는 복음의 빛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교만하게 이 빛을 더 좋은 빛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더하고 무언가를 뺀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잘 듣고 복음을 믿을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복음의 빛을 왜곡한다. 복음의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거북할까봐 메시지를 축소해서는 안된다. 혹은,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마치 약속하신 것처럼 선포해서도 안된다. 복음의 빛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빛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의 인도자들이 이런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받은 직분에 대한 오해와 의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직분을 하나님께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일을 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를 경영하는 것에 대한 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직분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삶이 복음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줘서는 안된다. 그 영광과 아름다움이,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 우리 삶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이 영광의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감하지 않고 확신 가운데 말하고 살아갈 때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역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수적인 우파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우리는 진보적인 좌파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가는데 있어 과거의 전통에 매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보수든 진보든, 우파든 좌파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한다. 그렇게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렇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 따르는 열매들이 지금은 안보일 수 있다. 모든 것을 통해 나라는 사람은 전혀 인정 받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무시 당할 수도 있다. 믿음에 따라 복음을 위해 살면서 다른 사람들만큼 누리지 못하고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왜”라고 물을 수 있다. 낙심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확신을 따라 행할 수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확신에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사람들의 마음에 비추실 것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사람이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혹은 남편일 수 있고 자녀일 수 있고 부모님일 수 있다. 혹은 원수 같은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누가 되었든, 우리는 큰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라. 그리고 그 확신 가운데 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