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 – 1
본문 : 시편 9편 1-12절
설교자 : 최종혁
시 9:1-1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왕이 있음을 인식하고 늘 그분을 찬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론 그 왕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고 무죄함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죄가 있을 때는 그 왕 앞에 나가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도 연약한 면이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원했던 다윗에게, 세상의 부조리함과 부정직함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보상하시며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던 그는, 하나님과 멀어진 세상을 보면서 실망하고 낙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사회는 공의롭지 않고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나라에 정의가 사라져간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은 동물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권력 있는 자가 압제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공의와 정의가 사라진 세상, 악한 자와 속이는 자가 잘 되는 세상, 우리도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악인들이 벌을 받지 않으니 하나님 대신 내가 가서 그들을 벌해야 할까요? 공의를 행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옳을까요? 오늘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이 우리에게 이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시편 9편과 10편은 연속적인 관계 때문에 원래 하나의 시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편 9편에는 표제가 있는데 10편에는 없습니다. 또한 9편은 답관체의 시인데, 답관체라는 말은 ‘머릿장단을 맞춘다’는 뜻입니다. 즉, 히브리어의 자음 순서대로 쓴 시인 것입니다. 시편 9편과 10편이 모두 그런 답관체의 형식인데, 더욱 주목할 것은 시편 10편이 9편에서 끝난 자음의 다음 자음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9편과 10편을 하나의 시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의 헬라어 버전을 보면 9편과 10편이 하나의 시편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시는 같은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왕이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실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상황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말이 9편과 10편에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시편에는 분명한 차이가 잇습니다. 9편에는 과거와 미래의 하나님의 일에 주목하고 있고, 10편은 현재 상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9편은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고 10편은 상황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9편은 ‘찬양’이 주가 되고 10편은 ‘탄식’이 주가 됩니다. 그러나 두 시편은 동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확신으로 끝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시인이 보고 있었던 상황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는 확신 가운데 시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시편 9편 1-12절을 보겠습니다.
1-2절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1절). 그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전심으로 감사하십니까? 불안, 분노, 원망을 내려놓고 온 맘을 다해서 전심으로 감사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결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는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기이한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입니다.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해 말하고 이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전파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2절). 이제 그는 하나님 자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고 말합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존하신 것, 높으신 것, 주권자,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이 보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높이 계시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찬양과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있습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3절). 이 찬양의 근거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런 상황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넘어진다”는 것은 원수들의 파멸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고 찬양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막연하고 근거 없는 확신이 아닙니다.
4-6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근거해서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4절). 다윗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관이심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대적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다윗을 좋아했지만 백성들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좋아하면서부터 그는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대적이 되고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숨어있었던 굴에 사울이 쉬러 들어왔습니다. 다윗의 수하들은 이것이 그를 죽일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고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2).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울 사이에서 판단하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삼상 24:15).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국은 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스스로 보복하기보다 하나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다윗은 또 다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으나 그 때에도 역시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10)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것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의 생각대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공의를 보여주시는 지 말합니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5절).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들을 멸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지우셨습니다. 책망은 유죄 판결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판결에 따라 그들을 멸하셨고 그 이름을 지워버리셨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아말렉에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출 17:1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실 때는 분명하게 하십니다. 민족을 세상에서 지워버리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6절).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시대 때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당대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신 심판도, 타락한 가나안 땅에 내리신 명령도 “그들을 진멸하라”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나타났던 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의로우심을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7-10절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는 ‘속성’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특징’, ‘성격’이라는 말을 씁니다. 한 사람의 특징을 아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대강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공식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성’은 다릅니다. 사물이나 물질은 어떤 속성을 알면 그 결과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물의 온도가 0도가 되면 언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속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상당히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크고 광대하시지만 그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그분이 하시는 일도 의롭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7,8절). 원수들이 영원히 멸망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리에만 앉아계신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하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므로 그분의 심판도 의롭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십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재판관이신 하나님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라는 것은 악인들에게는 재앙입니다. 반면에 의인들에게는 축복입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저를 심판해주십시오”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생각하면 피고의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죄가 없는 자로, 하나님이 돌보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있게 하나님께로 나가서 심판을 구하는 것입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9절). “압제를 당하는 자”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습니까? 악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자들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환란, 핍박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자가 아니라 요새가 되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절). 여기서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단지 지식적인 차원의 아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친밀한 관계 속에 들어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악인들을 돌보시는 것 같고,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과 주를 의지하는 자들을 버리시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확신으로 거할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의를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11,12절).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에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멀리 어딘가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계시고 그 안에서 자신의 뜻과 공의를 이루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12절에서 피 흘림을 “심문한다”는 것은 10절에서 주를 “찾는다”와 같은 말입니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피 흘린 자들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눈에 마치 잊고 계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십니까.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만 기쁨으로 예배드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원망과 분노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믿음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 역사를 통해 증명해주셨습니다. 그 확실한 근거위에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감사와 찬양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힘써 알아가십시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선포하겠다고, 주 안에서만 기뻐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