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66권의 책이 있고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구약과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신약으로 나뉩니다. 이 성경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복음서에는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에 대한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에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많은 사람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섬겼던 여인들,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따라다녔던 수많은 무리들, 반대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따라다녔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보고 동일하게 보였던 한 가지 반응은 바로 ‘놀람’이었습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눅2:47)”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4:2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눅4:32)”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4:36)”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8:25)”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9:43)”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11:14)”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20:26)”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일을 보고 놀랐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평생 봐왔고 역사적으로 알았던 어느 누구와도 예수님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었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놀라게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복음서에 단 두 번 등장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6:6)”
여기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은 ‘놀랐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던,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지 않음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또 한 번 예수님이 놀라신 것은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7:9)”
여기 예수님을 놀라게 했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놀라게’ 했다면 여기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눅7:1-10)”
오늘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보여줄 본문의 주인공은 백부장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세 가지 나오는데, 하나는 사람들의 평가이고 또 하나는 백부장 자신의 평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1)”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은 바로 앞의 6장에 등장하는데, 산상수훈 즉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참된 하늘나라 백성의 모습은 이와 같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이고 의로우며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가 아니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게 그렇지 않음을 알려주시고 마음 속에 죄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참된 하늘나라의 백성은 원수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바탕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겸손에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이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며 어떤 백부장을 만나십니다. 그가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십부장과 천부장 사이에 있는 사람으로, 약 백 명의 군사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다양한 국적이었고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군사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돈을 매우 잘 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백부장들은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곤 했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사람,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주었던 사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고넬료 등이 백부장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 최고의 찬사는 오늘 본문의 백부장에게 주어졌습니다.
당시 종은 사람의 개념보다는 소유물의 개념이 컸습니다. 우리는 전화기가 고장 나 못쓰게 되면 버리고 새로 사지 그것을 사랑하여 고쳐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종의 개념은, 종이 병들면 버리고 다른 건강하고 일 잘하는 종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이 죽음 직전에 있던 상황으로 보입니다. 백부장은 그 종을 사랑했습니다. 본문의 2절 말씀에서는 ‘종’이라는 표현을 쓰고 7절에서는 ‘하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자(누가)는 그를 일반적인 노예의 의미로 가리키고 있지만,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하인’이라고 말했는데 그 단어는 일차적으로 ‘아이’, ‘자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백부장은 그 종을 자신의 아이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종교적인 지도자이기 보다는 사회적인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4)”
이방인인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을 보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당시는 유대인이 이방인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기 유대인 장로들은 이방인의 심부름을 하면서 그것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부장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고 자격있는 사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5)”
유대인과 이방인은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적대시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종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원수 같은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필요를 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이것이 백부장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였습니다.
그렇다면 백부장 스스로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이 오고 계신지 어떤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친구를 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합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6)”
처음에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 유대인 장로들을 보냈지만, 이제 보내 놓고 생각해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집에 들어오시기에는 내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예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원문에는 “당신이 제 지붕 아래로 오시기에는 제가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장로들의 평가와 사뭇 다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7)”
백부장은 자신을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이 말한다면 그는 자존감이 심하게 부족하다고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그럴만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사람은 이외에도 ‘세례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기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기적을 보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고,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는 감히 우러러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고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백부장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주님이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나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만지거나 접촉이 있어야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눅6:19)” 그러나 백부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
누군가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그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은 복종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위로 로마 왕과 천부장이, 아래로 십부장이 있었습니다. 권위를 가진 자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명령만 하면 순종했던 것입니다. 백부장이 했던 말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이 질병 위에 권세를 가진 분이 아닙니까.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으로서 만물을 발아래 두고 계신 분이 아닙니까. 굳이 내 집까지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에게 권위가 있지 않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백부장이 자신을 낮게 평가했던 것은 예수님을 높게 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이 여전히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대 장로들은 백부장이 했던 일에 기초해서 그를 평가했지만, 정작 백부장 자신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지위나 행위, 돈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앎, 그것에 기초한 낮아진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9)”
성경에서 단 한번 여기서 예수님이 사람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따르던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
이 말씀은 백부장에 대한 칭찬인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이 신기해 따라다녔고 자신들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자만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위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에 의심치 않았고, 굳이 그 장소에 있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것으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덕목입니다. 자신을 낮추다보면 그렇게 낮추었다는 생각에 다시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나를 바르게 바라볼 때 따라오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분인지 알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가치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병 고침의 능력을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철저히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그들을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백부장, 유대인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더 거룩해 보이고 하늘나라 백성에 합당한 자들이다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부장,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서 원수를 사랑하고 종을 사랑했던 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권세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 그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은혜를 구했던 백부장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10)”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종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증거는 겸손입니다. 또한 그 겸손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갈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17:5)”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6-10)”
우리는 이 말씀의 사도들처럼(“믿음을 더하소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그 분 앞에서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를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