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울이 묻고 바울이 답하다
본문: 로마서 3장 1~8절
설교자: 이병권
한 신학교 교수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20년 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다 보니 이제는 거의 정확하게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무슨 질문을 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어떤 내용이 학생들에게 질문이 되는지, 어려워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교수가 그러하다면, 사도 바울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는 20년 이상을 복음을 위해 수고했을 때입니다. 바울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묻는지 무엇이 걸림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질문을 듣고 바로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지금 서신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중의 질문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고 질문에 답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이 저에게 직접 질문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저 혼자 계속 말합니다. 그래서 때로 예상 되는 질문이 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제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사람에게 질문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잠시 설명을 멈추고 그에 대한 질문을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고 대답한 것에 대해서 다른 질문이 생기니까 그에 대해서 다시 대답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질문하고 또다시 대답합니다. 그러고 나서 설명을 다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좀 특별합니다. 특별하다는 말은 그만큼 오늘 본문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한 주석가는 오늘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해서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초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있는 연결 부분과 같고, 서신의 핵심 사상들과 주제들이 지나가는 선로의 교차로와 같다” 복잡한 주제들이 나오는데 자세히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짝 언급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에 가서 제대로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질문들을 볼 때는 이 질문이 왜 나왔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바울의 논리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질문들을 이해하려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혹시 설교를 들으시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큰 맥락에서 바울이 이런 의도로 말하고 있구나! 이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상되는 질문들을 묻고 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유대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율법과 할례, 그들은 율법과 할례를 통해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유대인도 차별 없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진짜 유대인은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위선적인 모습,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은 없으면서도 율법의 소유와 할례가 주는 거짓된 안전에 빠져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고에 대해서 유대인이라면 어떤 질문을 가지게 될까요?
바울의 경고를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도 다 똑같다. 유대인에게 율법과 할례가 있어도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유대인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말은 들으면 어떤 질문이 생길까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롬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바울의 경고를 들은 유대인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이점은 없는 겁니까? 할례를 받아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하나님은 왜 할례를 명령하신 겁니까?
여러분이 만약 VIP카드 회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카드를 받은 것입니다. 그 카드를 받기 위해 연회비를 내고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VIP카드가 주는 혜택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떨까요? VIP카드가 일반 카드와 똑같다면, 여러분은 카드사에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카드를 취소하겠다고 연회비 환불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는 율법과 할례가 아무런 유익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갖는 특권이 없다는 말 같으니까 질문하는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대답을 합니까? 첫 번째, 바울의 대답입니다.
롬 3: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은 예상 밖에 대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라는 것도 육신의 할례도 심판에 있어서 아무런 효력이 없으니까 그 유익에 대해서 물었을 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대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범사에 많다”라고 대답합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면제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에게는 다른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특권을 바울은 “우선은”이라고 말합니다. ‘첫째로’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이 범사에 많다고 하면서, 첫째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다른 특권을 말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첫째로 끝납니다. 바울은 우선적으로 한 가지만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특권들은 훨씬 뒤에 9장에 가서 다시 언급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이라는 주제를 살짝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대신 여기서는 한 가지 유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행한 대로 심판받는다는 사실은 유대인이 가지는 특권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첫째가는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특별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아서 관리하는 특권적인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도 허락되지 않은 특권입니다.
시 147:19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시 147:20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제사장 나라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는 것, 그 말씀을 알 수 있다는 것,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 유대인에게 주어진 커다란 특권이자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도 그러한 특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당시 유대인보다 더 확실한 분명하게 계시된 66권의 성경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맡은 특권에 대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유대인의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롬 3: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유대인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부르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이어지는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합니다.
그들의 믿지 아니함으로 인해 영원한 언약은 다 깨어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유대인을 향한 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미쁘심, 그 신실하심이 헛되게 된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 번째 대답입니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유대인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사람은 미쁨이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미쁘십니다. 하나님은 진리 되시기에 그 하신 모든 말씀은 참이 됩니다. 그래서 하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며 말씀은 모두 이루어집니다. 유대인이 어떤 일을 벌이든지, 불신하든지 불의하든지 불성실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제까지 영원토록 신실하십니다. 바울은 이 주제에 대해서도 여기까지만 살짝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유대인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실제로 어떻게 성취되는지에 대해서는 9장에 가서 설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시편 51편에 나오는 다윗의 회개의 시를 인용합니다. 이 회개의 시편은 하나님 심판의 의로움을 말합니다. 다윗의 시편과 바울이 인용한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그 심판에 있어서도 신실하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의 믿지 아니함을 심판하신다고 해서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하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이 취소되거나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공의로우신 심판으로 인해 하나님의 참되심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이 증거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심판에 대해서 세 번째 질문을 하게 됩니다.
롬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만일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한 불의는 하나님에게 좋은 것 아닙니까? 우리 죄가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어둠이 하나님의 빛을 더 밝고 더 빛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더 빛나게 만든 우리에게 진노가 아니라 상을 주셔야죠!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이 아닙니까?
말이 안 되는 말이기에 바울이 특별히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이 말이 안 되는 세 번째 질문은 네 번째 질문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질문입니다.
롬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세 번째 질문에서 조금 더 발전된 것이 네 번째 질문입니다. 나의 거짓말로 인해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다면 나의 거짓말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한 거짓말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세 번째 질문과 같은 논리로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대답을 합니까? 세 번째 대답입니다.
롬 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어리석은 질문을 즉각적으로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수 없다는 바울의 설명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중보하면서 하나님께 했던 말입니다.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해서 나에게 유익을 주었기 때문에 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에 나의 의를 더 돋보이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한 이유로 판결을 굽게 하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심판 자체를 하실 수 없는 분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네 번째 대답입니다.
롬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는 ‘선’이라고 한다면, 결국 선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악을 행하자고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다고 해도 그 목적을 얻기 위해 악한 방법이 사용된다면 그 일은 좋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질문입니다. 죄는 단순히 짓는 것으로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죄는 무언가를 망가뜨립니다. 피해를 주고 아픔과 고통을 줍니다. 죄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방대원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불이 났을 때 화재의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고하는 그들의 용기와 기술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들의 수고와 용기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회재와 재난을 일으킨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로 인한 피해와 희생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희생자가 없는 죄는 없습니다. 피해가 없는 죄는 없습니다. 모든 죄는 그 결과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피해를 받고 누군가는 희생되며 누군가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반드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피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죄는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절대로 죄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죄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자신이 이런 말은 한다고 하는 이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주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살짝 언급하며 지나갑니다. 다음에 6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바문바답, 바울이 묻고 답하는 네 가지 질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진리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미쁘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참되심으로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그분이 하신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의 어떠함에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말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심으로 그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 보상하실 때는 물론, 범죄에 대해 심판하실 때에도 신실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유리하게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판하실 때에도 신실하시다는 사실, 그분의 참되심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약속만 생각하고 죄에 대해서 꾸짖고 징계하신다는 약속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103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시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시편에 기록된 “우리”를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적용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편은 “우리”를 또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경외하는 자”, “경외하는 자”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시편이 말하는 “우리”에 대해서 그냥 ‘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관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을 경외함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그 앞에 나아오는 죄인,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여 그분을 경외하는 자를 은혜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분의 참되심은 회개 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서는 엄중한 심판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도 신실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실하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것이 신실하지 못한 유대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했던 실수를 따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말씀으로 나를 점검하며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