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

본문 : 요한일서 2장 7절~11절

설교자 : 조 정 의

347년경 태어난 4세기 신학자 제롬은 사도 요한의 일화를 들려 준다. 사도 요한이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게 되자, 에베소 교인들 앞에서 한 마디 권면하는 것으로 만 족하게 되었는데, 그는 권면할 때마다 어린 자녀여, 서로 사랑 하십시오라고 늘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에 식상한 청중이 견디다 못해 왜 이렇게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냐고 묻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것만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데이비드 잭맨, <요한서신강해: BST>, 11p).

요한은 그만큼 사랑을 강조한 사도이다. 스스로를 “주가 사랑하 는  제자”라  칭했고(요  19:26),  요한일서에만  53번  “사랑”을  말 했다(요한복음 포함 110번, 신약 전체 거의 30%). 그런데 이 “사랑”은 영생과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 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불어 믿음으로 사랑의 사귐을 누리는 것인데(요 1:1-4; 요 17:3),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 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명령에 즐거이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사랑을 표현한다(1:5-2:6).

그러면 사랑의 주와 동행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 사랑하지 않아도 될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를 심히 미워하고 성도 간에 갈등의 불이 꺼지지 않고 내 안에 성도를 향한 사랑이 턱없이 부족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빛과 어둠을 나누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 현 주소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리신다. 이 말씀을 통해 형제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영생을 가진 자에게 얼마나 비정상 인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여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길 바란다.

1. 이유1: 성도 사랑은 예수님의 명령이다(7-8)

예수 안에 살면서 성도를 미워해도 될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과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밝히신 뜻을 예수님이 변경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옛 계명 을 통해 분명히 밝히신 뜻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7절)

요한은 먼저 편지의 독자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른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친 밀하고 진실한 말로 독자에게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를 위해 꼭 필요한 교훈을 준다.

요한은 자신이 지금 그들에게 쓰는 것이 새 계명이 아니라고 말 한다.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그들이 들은 말씀이다. 참으로 하 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부터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명하시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돌판에 새겨 말씀하셨다(출 34:28; 신 10:4).

또한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첫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고(마 22:37), 둘째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다(마  22:39).  사도 바울도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 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갈 5:14).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을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어쩌면 당신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노력은 하겠지만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고 여긴다. 하지만 계속된 요한의 설명에 주목하라.

요한은 성도 사랑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그리고 그들이 말씀 을 통해 들은 옛 계명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8절을 보면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예수님께서 그렇게(“새 계명”)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은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의 “새 계명”은 내용에 있어선 달라진 게 없다. “서로 사랑 하라.” 하지만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근거와 본과 원동력이 되어 주신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①근거: 예수님 없이 우리는 하나님도 성도도 사랑할 수 없다. 하 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사랑의 사귐을 누리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성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는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벧전 1:2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영혼이 깨끗함을 받아 진리를 순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진실한 성도 사랑을 할 수 없다. 그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사랑의 근거다.

②본:  예수님은 서로 사랑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새 계명이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고 말했다(8절).

예수님(“그”)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하나님 사랑의 본, 겸손히 발을 씻기고 우리 죄를 담당하신 형제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에게 “사랑”이 온전히 나타난 것처럼(참된것 = 입증 된 것, 발견된 것), 그분 안에 사는 우리에게도 참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③원동력: 요한은 8절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비춰주시므로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자는 예수님께 서 사랑의 빛의 원동력이 되시기 때문에 그 빛을 성도에게 반사 할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며 또한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 이 계명을 주실 때의 의도대로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다”(309페이지).

그러므로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옛 계명에 예수 님으로 인해 새로운 방식으로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몰아내시고 성도 사랑에 순종할 수 있게 하셨고(근거), 성도 사랑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시며(본), 계속해서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빛을 우리 안에서 비추고 계시기 때문이다(원동력). 예수님 의 계명은 분명하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순종에 필 요한 모든 자원이 되신다. 그래서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예외도 될 수 없고 핑계도 댈 수 없다.

2. 이유2: 성도 사랑은 예수 안에 사는 증거다(9-11)

이후 요한은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당신은 영생을 누리면서 성도를 미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생 을 가진 자의 확실한 증거가 성도 사랑이기 때문이다. 중립지대 가 존재하지 않는 빛과 어둠의 비유로 요한이 이를 설명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한다(9절).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 즉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영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다(현재형).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 자에 대해 요한은 “지 금까지(still, “여전히”, “아직도”) 어둠에 있는 자”라고 판단한다. 다시 말해 참빛이신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실상 예수님 밖 곧 어둠에 있는 자라고 정죄한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증오, 폭력, 분노, 비방과 같은 외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한  주석가의  말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 의 부재”로도 나타난다(데이비드 잭맨, BST). 성도에 관한 철저한 무 관심, 공감이나 동정도 없고 사랑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 것 역시 어두움 가운데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사는 자의 증거는 무엇인가? 10절을 보라.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10절)

참빛 곧 예수님 가운데 거하는 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다 (현재형). 앞에 나온 미움이 그 사람의 특징을 규정하듯, 형제 사 랑도 빛 가운데 거하는 이의 참 특징을 규정한다. 그는 형제자매 를 사랑하는 삶을 산다. 분명히 그것이 삶에서 보인다. 특별히 요 한이 말한 “형제”엔 넓게 원수와 이웃도 포함되나, 좁게는 예수 안에 같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공유한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넓게는 이웃 사랑, 좁게는 성도 사랑이 당신이 예수 안에 산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면, 내가 지금 성도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외적으로) 주중에 전화를 많이 걸고, 자주 성도를 찾아가 만 나고, 성도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 시간과 물질을 성도를 위해 사용하는 것, (내적으로, 성품적으로) 성도와 관계 속에 미움과 분노, 자랑, 시기 등 죄를 멀리하고 오래 참고 온유하고 이타적으로 성도의 유익을 구하는 것 등이 될 것이다(고전 13장). 하지만 특별히 요한이 주목하는 성도 사랑의 열매는 다음과 같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 곧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 이 없다(10절).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거리낌(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 13번 정도 언급되는데, 누군가 를 “넘어지게 하는 것”(마 13:41; 16:23), “실족하게 하는 일”(마 18:7; 눅 17:1), “거치는 것”(롬 9:33; 11:9), “걸림돌”(갈 5:11; 계 2:14) 등을 말한다. 참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앞이 나 성도 앞에 죄의 덫이나 미끼를 두지 않는다. 죄의 유혹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 결과 다른 성도가 죄에 넘어질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 요한이 여기서 주목한 성도 사랑은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 영생 을 가진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 속에 죄를 두는 자, 곧 죄로 자기뿐 아니라 성 도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그 안에 어둠이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 과도 사귐이 없는 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성도 사랑이 예수 님 안에 사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 고 예배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면 서도 성도와의 관계에 많은 걸림돌을 두고 제거하지 않고 아무렇 지 않게 사는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이 별개로 분리 된 것처럼 여기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가? 틀렸다. 그럴 수 없다!

마치 상의는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하의는 발가벗은 사람처럼 당 신과 하나님의 사귐이 아무리 기품있고 빛나고 아름다워 보여도 성도(가족 포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인이다.  요한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분명히 말했다(요일 4:20). 그만큼 성도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직결 되어 있다. 다음 말씀이 내린 평가를 보라.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11절)

그는 분명 어둠에 있다. 어둠에 속한 자다. 그래서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은 마음이 죄로 완고해졌다는 것이다(요 12:40).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과 성도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참빛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도 형제자매 에게 그 빛을 반사하지 못한다면, 분명 중간에 그 빛을 가로막는 어둠 곧 죄가 있다는 말이다. 상류에서 흐르는 물이 막히면 하류 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이 형제자 매에게로 흘러가지 않는 사람은 중간에 죄라는 쓰레기가 꽉 틀어 막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죄가 돌처럼 굳어졌다는 말이고,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슬프게도 처 음부터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란 게 밝혀진다.

3. 적용

설교 제목이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이다. 원래 제목을 “미워할 수 있을까?”로 지었다가 바꾸었다. 우리는 성도를 미워할 수 있다. 여전히 옛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성도를 미워해도 된다’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형제를 미워하는 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과 함께 사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이가 사랑하지 않는건 비정상이다. 하나님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오랜 세월 미워하고 있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어떤 이유로든 거리를 두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 간에 불협화음을 내며 살고 있지 않은가? 회개하고 돌이켜라. 하나님께 자백하고, 성도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예수 안에 사는자 답게 서로 거치는 것을 두지 말고 뜨겁게 사랑하자. 이것만 순종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