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의 경주
본문 : 히브리서 12:1-3
설교자 : 조 성 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저와 제 아내 사이에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 있습니다. 저는 흰 쌀밥을 먹고 싶다고 하고 아내는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덜 살아도 되니 흰쌀밥을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흰 쌀밥으로 대접해드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제 설교에 많이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형제들은 잡곡밥을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건강에는 잡곡밥이 훨씬 더 좋습니다. 새로운 일꾼들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들으신다면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새해 첫 주를 맞이하여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에 대해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믿음의 경주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떻게 이 경주를 달릴 수 있으며 어떻게 마칠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절). 여기서 가리키는 사람들은 11장에서 말한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등 이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증인은 법정에서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거짓없이 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증인을 삼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에 대해 그 누가 그것을 헛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우리 역시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당시 소유의 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재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고 제자의 삶을 살다가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습니다. 마태는 오늘날로 말하면 세무서 직원이었는데 그 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그물을 깁다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도 쉬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왕이었던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고난을 견뎠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첫째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절). 여기서 말하는 “모든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우리를 붙잡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돈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거운 짐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묶여있습니다. 통계상으로 열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왜 믿음의 길을 달려가지 못했을까요?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과거에는 참 신실한 형제 자매였는데 그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도 무거운 것들, 즉 돈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를 달리지 못하게 잡아매었을 것입니다.
돈은 이 세상에 살 동안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미련하게도 제일 좋은 옷은 집에 잘 보관해두고 평소에 입고 다니지 않습니다. 좋은 그릇은 귀해서 잘 두고 쓰지를 않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쓰려고 두었다가 나중에 자식들의 손에 의해 버려지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단은 우리가 그것에 매여서 달리지 못하기를 원합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을 때 ‘남자들만 가라’, ‘멀리 가지 마라’, ‘가축을 두고 가라’라고 하면서 할 수 있다면 그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지속적으로 달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물질을 통해 붙잡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자녀와 아내, 또는 남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말한 사람에게 주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자녀들에게 참 많이 매여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순종하고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매일의 삶을 보면 자녀에게 너무 많이 매여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고 그들 각자에게 사역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자녀들 때문에 신앙의 길을 달리지 못하고 은사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주님 안에서 양육하고 키워야하지만,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있어서 주저앉게 만드는 자녀에 대한 애착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초창기에 유평교회가 시작될 때 형제 자매들은 자녀들을 키울 때 무엇보다 주님이 첫째자리에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주님을 첫째자리에 둔 부모들의 자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오로지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주님 안에서 많이 멀어져있는 것을 봅니다. 내 마음에 과연 주님이 첫째자리에 계시는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는데 내 모든 삶이 집중되어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가정을 돌아보고 직장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우선순위는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곳도 알지 못하고 가족을 떠나왔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따를 때 애굽의 모든 금은 보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믿음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교육도 직장도 필요하지만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렸습니다.
육체적인 연약함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콤플렉스에 매여서 믿음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사람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참 아름다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생활에 너무 많이 매이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얽어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경우 타국에서 엄청난 핍박을 받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어떤 환경도 가족도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세상도 물질도 가족도 내 자신의 목숨까지도 이를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에 대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점점 더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열린문 선교지를 보니 태국에서 선교하시는 분이 쓴 글이었는데, 태국에서는 가장 좋은 사범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 남자 100명 중에 20-25명만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나머지는 동성애나 성전환자들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교사가 되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할까요?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나이의 사람들만 해도 손에는 성경보다 스마트폰이 더 많이 들려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데 있어서 얽어매는 죄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절). 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이나 우리의 믿음의 모델인 예수님이나, 그들은 달릴 때 눈 앞에 있는 고난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결과, 즐거움을 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하나님이 지으신 성을 보고 평생을 텐트에서 살아갑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에 있는 동안 나그네로 산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앞에 있는 애굽의 영광보다, 또 노예 생활의 어려움 보다, 상주시는 이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했는데 결승점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을 하겠습니까? 그 어려운 경주에서 승리하면 얻는 것도 많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썩을 면류관 때문에라도 그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경주의 비결입니다. 하늘의 성,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에 그들의 눈이 고정된 것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이 경주가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사업이 잘 된다’,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믿으면 좋은 결과만 있다’라고 들었기에 어려움이 닥치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길은 좁은 길이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다고 하셨고, 물질이나 가족, 목숨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망대를 세울 수 있을지, 군대를 가지고 나가서 이길 수 있을지를 계산하듯이 나를 따를 때 계산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세상이나 가족,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의 순간에 내 목숨을 사랑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러한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도 바울도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경주를 달릴 때는 방해물이 없어야 합니다. 아내가 가끔 저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늘 ‘당신을 두 번째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늘 그 첫째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기에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아내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 나를 잡아매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고 돌아보며 책임을 다하지만 그 관계가 주님을 따라가는데 신앙을 포기하도록 병들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주님을 순종하고 따라가는데 방해하는 많은 시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나 물질, 가족, 자녀, 배우자,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항상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한 삶을 살고 난 뒤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 바울, 요한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경주를 끝냈지만 우리는 아직 달려갈 길이 남아있습니다. 무거운 것들과 얽어매기 쉬운 죄로 매여서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몇 해 전에 한 초등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선수들을 뽑아서 계주를 하는데, 계속 1등으로 달리던 팀의 주자가 뛰질 않고 걸어갔습니다. 뭔가 건강이 안 좋은가 보다 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오늘은 달릴 기분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세상이나 물질, 자녀, 남편이나 아내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