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슨 권위로?
본문: 누가복음 20장 1~8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부터 우리는 누가복음 20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간의 논쟁을 살펴보려 합니다. 총 3번의 논쟁 가운데 오늘은 그 첫번째 논쟁인 예수님의 권위 논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마음 속 오만하고 무지한 생각을 살펴보고 그것을 거울 삼아 우리 마음을 비춰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 속에 담겨있는 그분의 놀라운 신적 권위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1. 질문(1-2)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예수님이 질문을 받은 날짜는 화요일입니다. 누가는 “하루”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19장 47절에 기록한대로 예수님은 일요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나서부터 잡히시는 날인 목요일까지 낮에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눅 21:37).
월요일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내쫓으시고 날이 저물어 성 밖으로 나가 감람원으로 가서 제자들과 쉬신 후(21:37) 다음날인 화요일 아침 다시 성전에 들어와(막 11:20) 가르치고 계실 때 이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 날을 “거룩한 화요일”(Holy Tuesday)이라 부르며 기념합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받은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사가 드려진 성전 안 뜰이 아니라 성전 밖에 있는 뜰, 광장(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대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이 며칠 앞에 있었기 때문에 전국 그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었을 것이고, 광장에서 몇몇 랍비가 군중을 대상으로 가르치면 그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누가의 기록대로 “백성이 다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눅 19:48).
논쟁이 있던 화요일 낮에도 예수님은 가르치시며(디다스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후앙겔리조). 하나님의 도를(눅 20:21)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눅 19:10).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제자들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4:43). 이것이 잡히시던 날까지 예수님이 하셨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 대상은 바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복수). 각각 하는 일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유대교의 특권 계급에 속한 자들입니다. 유대인의 최고 회의 기관, 통치 단체인 산헤드린의 구성원입니다(대제사장+70명). 오늘날 국회의원, 대법원장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당시 정복 국가인 로마는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 산헤드린에게 통치권을 양도했습니다. 예를 들면 산헤드린은 성전 안 뜰로 들어온 이방인에게 즉각적 처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오스본, 721). 종교적인 이유로 사람을 처형할 수 있는 권리까지 이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장로 중 의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을 나시라고 불렀는데, 그는 율법을 제정하고 공식적인 유대교 의식 일정을 정하며,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성전을 관리합니다. 대제사장과 협조하여 중요한 재판을 위한 위원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당시 “나시”는 다소 사람 사울의 스승이었던 유명하고 존경받는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자기들 권위로 관리되는 성전에 들어와 아무것도 아닌 30세 랍비가 성전을 이렇게 사용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면서 자기들이 허가하여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칩니다.
‘도대체 니가 뭔데,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하느냐?’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권리로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유대교를 위협하는 이 예수를 처형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환호합니다.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예수님을 잡아다 심문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눅 19:47-8). 그래서 이들이 모여 만든 한 가지 꾀를 가지고 드디어 예수님 가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을 가합니다. 2절에 나오는 이 질문으로 말입니다.
2…“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너에게 무슨 권위가 있느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행할 권위를 주었느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은 그냥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꾀를 내어 이 질문을 던진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전의 최고 권위자인데 너는 허가받지도 않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런 비난과 책망의 태도가 묻어있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의도가 다분한 질문입니다. 그들은 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누구라고 하는지,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낼 때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가르치고 행하셨다는 것을 이들이 모를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그 말을 직접 듣기 원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주머니 속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①예수님이 만일 “나에게 권위를 준 분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으로서 이렇게 할 권위가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붙잡아 심문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인 주제에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기 때문이죠.
②하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나는 뛰어난 선생으로 내 권위는 나를 따르는 많은 사람에게서 온다”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그들에게 크게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는 왜 하나님이 세우신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하느냐?”고 책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권위가 사람에게 났다면 너는 이렇게 행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그만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든 그들은 예수님을 무너뜨릴 완벽한 계획을 짜고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잘 몰랐습니다. 그들이 상대했던 분은 이미 12살에 성전에서 가르치던 많은 선생을 놀라게 했던 충만한 지혜의 소유자였습니다(눅 2:46-7).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은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2. 반문(3-4)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예수님의 화법이 직설적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말하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는데, 정확히 그 반대로 예수님은 “내게 말하라”고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너희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하는 질문에 먼저 답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논쟁이었다면, 저쪽에서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라고 따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교묘하게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질문에 답하진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우리를 참으로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반문에는 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있고 그 답을 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반문을 살펴봅시다.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권위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세례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셨습니다. 요한이 하늘 곧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례를 베푼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그를 좇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한 것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이 논쟁을 하실 때 세례 요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선지자와 같이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외치는 소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부르짖고 그들이 요단 강으로 나오면 회개의 의미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백하고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막 1:5). 요한은 당시 헤롯의 죄를 직접적으로 책망하면서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의 꾀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니 요한은 진정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웅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은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선지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기적을 베푸실 때 그 소문이 헤롯왕에게 들렸고 헤롯은 “내가 죽인 세례 요한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막 6:14).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으로, 그 권위를 하늘에서 받은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권위로 침례를 준 요한은 자기 뒤에 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했습니다(요 1:34).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는 분은 성령과 불로 줄 것이라 말했습니다(눅 4:16).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을 때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분명히 확증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그러므로 예수님이 요한이 하늘의 권세를 받아 침례를 준 선지자라면, 그가 그리스도라 일컫고 그 신발끈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했던 분이라면,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라 말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일 요한이 단지 사람이 세운 선생 중 하나였다면, 그 권위 가 사람에게서 왔다면, 예수님의 권위도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건 수많은 백성이 대부분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요한을 인정하면 나를 인정해야 하고, 요한을 부정하면 그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과 맞서야 할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이제 대답은 종교지도자들 쪽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타임아웃입니다.
3. 대답(5-8)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것이라” 하고
5-6절은 종교지도자들이 타임아웃 시간에 나눈 말입니다. 예수님의 반문을 듣고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두 가지 대답을 자기들이 선택해서 말해야 하는 상황인데, 둘 다 선뜻 고를 수가 없습니다.
①만일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너희는 왜 그를 믿지 않냐?”는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이 침례를 베풀 때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한 앞에 나아갔다가 “독사의 자식”이란 책망을 들었습니다(마 3:7).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꾸짖음을 받았으나 그들은 요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권위가 하늘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한다면, 왜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냐고 예수님께 책망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권세가 하늘로부터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소개한 나의 권세는 어디로부터 났겠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듣고 싶었던 대답을 그들 입으로 해야 합니다. “당신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겠군요”라고요. 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을 것입니다.
② 그러면 반대로 요한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하늘에서 권위를 준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돌에 맞을까 염려합니다. 참된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로 여기는 것에 대한 형벌로 백성이 그들을 돌로 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이 인정하고 소개한 그리스도의 권위 역시 함께 인정하고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꺾였을 때 민심이 완전히 거꾸로 돌아섰지만, 지금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로 그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유공자들이나 위대한 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을 멸시하는 발언을 하면 사람들의 뭇매를 맞습니다(댓글). 이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멸시하면 댓글이 아니라 진짜 돌로 맞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심각한 논의 끝에 그들이 낸 결정은 7절입니다.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유대교 최고 특권 계급, 학자 중의 학자들이 고심하여 낸 대답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들의 무지함 그리고 완고함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권위는 죽어도 인정 못하겠고, 사람들이 두려워 그들이 진짜 생각하는 대로 두 사람이 그저 사람의 권세를 받아 일하는 존재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무지한 대답에 예수님이 이렇게 응수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하시니라
예수님이 한 질문에 그들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들이 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르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 나도 너희에게 알려줄 의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문 속에서 우리는 그분 대답을 확실히 들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 메시아를 증언했던 선지자였고,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고 행하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논쟁을 마치시고 곧 이어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속에서 더 분명하게 지금 그들이 누구를 거절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책망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주에 살펴볼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눅 20:9-18).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의 권위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유대땅에 태어나 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물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거나,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겉으로 속일 수 있어도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둘 중 하나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예수님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친구, 가족, 자녀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천지 만물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여러분 안에 살아있는 양심은 누가 그 속에 집어 넣은 것입니까? 수천년 동안 기록된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소설입니까?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 속에 살아 있는 능력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모든 증거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완고하고 무지한 마음을 겸손히 내려놓고 예수님의 가르침, 그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정말 하나님이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십니까?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을 따르고 섬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 성경이 여러분에게 말할 때, “무슨 권위로 내게 요구하는가?” 질문하지 마십시오. 주님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용서하라고 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주님을 믿고 신뢰하라고 하면 믿고 신뢰하고, 선하고 덕이 되는 말을 하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 도둑질 하지 말고, 모이기에 힘쓰라 하면 모여서 서로 돌아보는 일에 힘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면 자라기 위해 노력하고. 온갖 더러운 것은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하면 거룩을 추구하고…
“내 삶의 권위는 내게 있는데 당신이 무슨 권위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마십시오.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겠습니까? 그것도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랑의 하나님께 우리는 감히 대들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피조물이 아닙니까? 그분의 보혈로 죽음에서 건짐받은 은혜입은 자가 아닙니까? 무슨 권위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의 영역에서 이부분만큼은 당신이 건드릴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