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주의 백성의 품격

본문: 사사기 15장 1절 ~ 20절

설교자: 이병권

 

품격이란 것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인 자질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신분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 일을 가리켜 품격이 떨어지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품격을 재물이나 명예, 가진 것으로 따지려고 합니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살면 그 사람의 품격이 높아지고, 더 비싼 차를 타면 다른 사람과 다른 품격을 가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의 품격을 올리는 것은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주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품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주의 백성의 품격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삼손의 경우,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주의 백성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삽니다.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삼손과는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지난 시간과 이어지는 삼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신분에 맞는 품격을 갖추기 위해 삼손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손은 세 번에 걸쳐서 블레셋을 공격합니다. 그럼 차례로 삼손이 왜 블레셋을 공격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삼손의 첫 번째 공격입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4-5)

이름 하여 삼손의 불붙은 여우 대작전, ‘구미호’가 아니라 ‘화미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서 두 마리씩 짝을 지어 그 꼬리를 묶고 홰를 달아 불을 붙이고 블레셋 사람의 밭으로 몰아갑니다. 불을 붙였을 때 뜨거움에 놀란 여우는 이리 저리 뛰어 다녔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마리를 묶어뒀으니 정신없이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여우들이 지나는 곳마다 불이 붙었을 것이고 여우들은 숨으려고 불이 붙지 않은 곳을 찾아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한 곡식 단과 추수하지 않은 곡식뿐만 아니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까지 온통 불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어떻게 이 많은 여우를 잡을 수 있었을까요? 특별히 4절과 5절은 동사 8개가 연이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장의 1/3이 동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삼손에게 이 일이 그만큼 쉬운 일이었기에 거침없이 이 일을 해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삼손이 살던 시기는 포도원에서 사자가 나오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 환경에서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삼손은 그 지역의 일 년 양식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면 삼손은 왜 이런 일을 했을까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이 일은 삼손의 사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삼손이 이 일은 한 이유가 1절과 2절에 있습니다.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1)

지난 본문에서 삼손은 화가 나서 아내를 두고 혼자 집으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삼손의 화가 풀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삼손은 다시 처가를 방문합니다. 이때가 밀을 거둘 시기였습니다. 삼손이 여우를 통해 밭에 불을 지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처가를 방문하면서 “염소 새끼”를 가지고 왔습니다. 지난 일을 정리하고 화해하기 위한 선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삼손은 지금 꽃다발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삼손의 마음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처가에 도착했을 때 장인은 그를 반기기보다 난감해합니다. 왜냐하면 장인은 삼손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이미 딸을 다른 남자에게 아내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장인이 말합니다.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2)

장인은 삼손에게 더 아름다운 그녀의 동생을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삼손은 장인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3)

삼손의 말이 맞을까요? 삼손에게는 허물이 없는 걸까요? 삼손의 말은 지금의 상황이 블레셋 사람의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장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준 것은 삼손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에게 잘못을 돌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내를 통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자신이 화를 내며 아내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도 삼손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원인을 돌립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실수로 컵을 쳐서 깨뜨렸는데, 누가 컵을 여기다 뒀냐고 화를 내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저 사람이 먼저 나에게 잘못 했기 때문이야!’ ‘저 사람의 잘못에 비하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 모두는 아담의 피를 이어받아서 아담처럼 핑계되고 자신을 살피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속에 있는 죄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이기적인 목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여우를 이용해 밭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그럼 삼손의 첫 번째 공격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좋은 결과를 거뒀을까요? 엄청난 재산 피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냅니다. 그리고 삼손이 왜 이 일을 했는지도 알아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의 책임을 삼손이 아니라 삼손의 장인과 그의 딸에게 돌립니다. 그들을 불살라 버립니다. 곡식에 불을 지르며 피해를 준 것은 삼손인데, 삼손이 아니라 그의 장인과 딸에게 앙갚음을 한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와 장인의 죽음은 참 역설적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자신과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 때문에 삼손에게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삼손은 그녀를 떠났고, 그 때문에 삼손의 장인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때문에 자신이 피하려고 했던 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이 행한 보복은 삼손이 다시 블레셋을 치는 원인이 됩니다. 삼손의 첫 번째 공격의 결과가 두 번째 공격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두 번째 공격이 이어집니다. 삼손은 블레셋이 행한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7)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8)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특별히 그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 부위만을 골라서 때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숙어적인 표현인데 엄청난 살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며 죽였다는 말입니다. 삼손이 얼마나 죽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삼손은 에담 바위에 있는 동굴로 내려갑니다.

에담 바위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유다 지파에 속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삼손에게 당한 일을 갚아주려고 유다 지파에 속한 “레히”라는 곳에 진을 치고 그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유다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삼손의 두 번째 공격은 블레셋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공격의 결과가 또 세 번째 공격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손이 블레셋을 공격한 일은 또 다음 공격의 원인이 되고 그 결과는 또 다음 공격의 원인이 됩니다. 이런 과정은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삼손과 블레셋은 모두 자신이 한 일이 상대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갚아 주려고 합니다. 행한 대로 돌려주길 원합니다.

그럼 누구 잘못일까요? 블레셋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삼손을 잡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블레셋 사람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삼손이 여우를 이용해 블레셋 밭에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삼손이 화를 내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삼손의 아내가 블레셋 사람에게 답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삼손이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백성이 주의 백성답지 못할 때, 이스라엘의 사사가 사사답지 못할 때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습니다.

블레셋의 압박을 받은 유다 사람들은 3천명이 모여서 삼손에게 갑니다. 그리고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무기도 없이 혼자 있는 삼손을 잡기 위해 3천명이 몰려왔습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후에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던 것을 생각해보면 유다 사람 3천명이라면 충분히 싸워볼 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블레셋과 싸우기보다 삼손을 결박해서 내어줍니다.

다행히 삼손은 유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삼손의 인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잘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새 밧줄 둘로 묶는데 특별히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은 후에 삼손이 결박을 푸는 것이 결코 밧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밧줄에 묶인 삼손을 데리고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은 소리치며 삼손에게 다가옵니다. 자신의 재산을 망치고 동족을 죽였던 삼손을 잡았다고 기뻐하며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골칫거리가 밧줄에 묶여서 나타났으니 얼마나 흥분되었을까요? 그런데 블레셋 사람에게 넝쿨째 굴러온 것은 호박이 아니라 폭탄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삼손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합니다. 성경은 삼손의 힘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힙니다. 삼손을 묶고 있던 밧줄은 힘없이 끊어졌고 삼손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듭니다. 새 턱뼈라는 것은 나귀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마르지 않은 턱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턱뼈가 단단하지 못해서 무기로서 별로 효과적이지 않음을 알려주고 동시에 삼손이 만져서는 안 되는 짐승의 사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삼손은 이 어이없는 무기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입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한 구절로 다른 설명 없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무기 같지도 않은 동물 뼈를 들고 싸우는데 막을 수 없습니다. 그 한 명 때문에 천명이 쓰러집니다. 이 한 명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까요? 이렇게 삼손은 블레셋에게는 너무도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큰 승리를 거둔 삼손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16)

멜로디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삼손이 만든 노래입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로 천 명이나 되는 시체 더미를 만들었다고 노래합니다. 히브리어로 “나귀”와 “더미”는 같은 소리지만, 다른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비슷하게 따라 해보면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배를 타고 가면서 배 한 상자를 먹고 배 두 상자를 먹었다’

이 노래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삼손은 이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노래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며 기념할 뿐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뒤에 나오는 그의 기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승리를 거둔 삼손은 심하게 목이 마른데 마실 물이 없어서 위기를 맞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물을 주셨습니다. 그가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제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다(18)는 언급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물이 없는 것에 대한 불평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감사나 어떤 찬양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0절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20) 삼손과 딤나에 사는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 이야기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때에 이십 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는 말로 끝납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지만 여전히 “블레셋 사람의 때”입니다. 블레셋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압제가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 싸워 보겠다는 의지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상대로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주의 백성으로서 그 품격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지냈지만, 자신의 욕심대로 행했고 자기 뜻대로 행했지 사사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의 때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에게서도 유다 사람들에게도 이스라엘 누구에게도 주의 백성이라는 품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백성인지 누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인지 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는 일도 같고 사는 방식도 같습니다.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서 큰 능력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가진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자기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을 치는 일을 하고 계시지만, 삼손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은혜를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 유익과 만족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 나에게 허락된 능력을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일에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백성 된 우리도 주님의 본을 좇아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백성으로서 품격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용,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듭 블레셋과 싸우는 삼손의 모습을 보면 이전의 사사들과 다른 삼손만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특징을 한 단어로 말씀드리면 “혼자”입니다. 삼손은 혼자입니다. 혼자 다니고 혼자 싸우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행동합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갔을 때에도 혼자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삼손은 독불장군입니다. 혼자니까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을 기회도 없고 그나마 있었던 부모의 조언은 무시합니다. 혼자였기에 누구도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서 그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혼자 수련하고 도를 닦아 특별한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함께”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불러낸 무리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서로 돕고 섬기고 함께 주님을 따르며 함께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혼자 하라고 혼자 있으라고 혼자 즐기고 혼자 생활하고 혼자 만족하고 혼자 지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 나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나를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성도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기 위해서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과 함께하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함으로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 함께 삶을 나누고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함으로 주의 백성으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힘 있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할 때 어두운 세상에서 주의 백성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함께 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서 주의 백성의 품격을 나타내며 우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의 백성으로서 품격을 지키기 위해 혼자 있지 말고 함께 하십시오. 교회가 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함께 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함께 하는 일에 가치를 두고 행하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은사를 사용함으로 함께 세워주고 서로를 돕는 일에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주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혹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혼자서 묵상하고 혼자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혼자 있을 때가 있었고, 사도 바울도 혼자서 훈련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조차도 사실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입니다.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도와 함께할 뿐만 아니라 더 우선적으로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장면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최후의 상황일 때 기도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없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삼손은 그의 생애 가운데 딱 두 번 하나님을 찾습니다. 오늘 본문에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한 번 찾았고, 또 한 번은 정말 최후, 마지막 죽을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하십니까? 혹시 평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다가 정말 힘든 일이 생길 때,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까? 그럴 때에 기도하는 것은 삼손도 하는 일입니다. 삼손도 그 때에는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에도 주님의 함께 하심과 임재를 구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중심적으로 나에게 뭔가 일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이름을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기도제목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품격 있는 삶을 허락하시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의 희생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은혜로 받은 예수님의 생명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의 백성으로서 품격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혼자가 되지 마십시오. 성도와 함께 하십시오. 교회가 하는 일에 함께 하시고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 그분과 교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고 교회와 함께 할 때, 그럴 때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서 더 합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의 백성의 품격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