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 길들여진 인생

본문: 사사기 14장 5절~20절

설교자: 이병권

 

지난 시간에 성인이 된 삼손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삼손의 첫 인상이 어떠했습니까? ‘내 눈에 좋사오니’로 요약됩니다. 삼손은 보는 것으로 결정하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삼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삼손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야생 동물의 경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잘 길들여지면 사람에게 유익하며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고 주인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삼손은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아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잘 길들여지면 주인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삼손은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자기 멋대로 본능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았습니다. 삼손에게 허락된 놀라운 능력은 낭비되었고 가능성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은 우리에게 예시가 되어 줍니다. ‘삼손처럼 저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삼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삼손과는 달리 행동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길들여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이 원했던 대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장면인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14장과 15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장과 15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고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과 결혼 중에 있었던 일, 그리고 결혼 후에 있었던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세 부분에서 각각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잠깐 살펴보시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14:6)가 나오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4:19)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5:14)가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표현이 조금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원래는 같은 표현입니다.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과 관련해서 삼손에게만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다’는 표현을 기준으로해서 세 사건을 구분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14장의 두 사건을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15장의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사건입니다(5-9). 삼손은 그의 부모와 함께 두 번에 걸쳐서 딤나로 내려갑니다. 먼저는 블레셋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딤나로 내려갔고 다음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딤나로 내려갑니다. 전에 삼손은 혼자 딤나로 내려갔었지만, 이번에는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갑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다가 포도원에 이르렀는데 나실인이 포도원에 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나실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실인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포도원에 가는 것은 유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포도원에 갔고 그곳에서 뜻밖에 사자를 만납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고 삼손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습니다.

찢었다는 표현은 쪼개서 둘로 나눈다는 의미인데, 삼손이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쪼갭니다. 칼도 없이 맨손으로 짐승을 찢는 것은 보통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마다 나타나는 모습이 이러합니다. 삼손의 육체적인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도원에 가서 위기를 만난 삼손이 초인적인 힘으로 사자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자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태로운 순간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자를 죽이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결과로 삼손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검을 만지면 그에 따르는 정결예식을 행하는 것이 나실인의 의무였습니다. 나실인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주검을 접하면 그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성막을 찾아가 제물을 바치며 8일 동안 정결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삼손에게 이 일은 참으로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성막을 찾아가서 이런 예식을 치르는 것은 삼손의 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딤나에 사는 블레셋 여인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신경 쓰며 고려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어떻게 합니까? 어떠한 다른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럼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나 정결예식을 몰랐던 걸까요? 이어지는 삼손의 행동을 통해서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6) 삼손은 이 사실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가 삼손이 사자를 죽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이일은 삼손이 혼자서 포도원에 들어갔다가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부모와 함께 포도원을 지나는데 사자가 달려든 것이 아닙니다. 삼손은 부모 몰래 포도원으로 들어가서 사자를 만났던 것입니다. 나실인이 괜히 포도원에 가서 생긴 일입니다.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삼손의 이러한 태도는 결혼을 위해 다시 딤나에 갈 때도 반복됩니다. 이 때는 더 분명하게 나실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8-9)

삼손이 사자의 주검을 보는 장면을 원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그가 보려고 돌이켰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삼손이 전에 자신이 죽인 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의도적으로 보려고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삼손은 그 주검을 보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주검에서 만들어진 꿀을 손으로 떠서 먹기까지 합니다. 꿀에 정신이 팔려 주검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나실인의 규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은 주검에 있는 꿀을 떠서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삼손의 신중하지 못하고 경솔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꿀을 혼자 먹기에는 미안했는지, 그의 부모에게도 꿀을 드려서 먹게 합니다. 삼손은 규례를 어기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까지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14장 시작부터 삼손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삼손은 자기를 위해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고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삼손에게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날뛰는 삼손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삼손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 길들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첫째로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나실인의 규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나실인이 지켜야 할 사항들, 천사가 나타나 전한 하나님의 말씀, 삼손은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길들여져서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통제를 받아 그 말씀 안에서 나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고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을 정리할 때, 말씀을 통해서 나의 인생을 정돈할 때, 그 때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통제를 받을 때, 진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말씀을 통해서 통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져서 말씀으로 통제받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말씀으로 통제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삼손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사사일까요? 이렇게 제멋대로인 삼손이 어떻게 블레셋 사람을 치게 되었을까요? 본문의 두 번째 사건이 그 계기가 됩니다.

두 번째 사건은 결혼 중에 삼손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삼손은 신부 측의 풍습을 따라 딤나에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이 결혼 잔치는 일주일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잔치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잔치에서 술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의 ‘잔치’라는 단어도 ‘마시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럼 이 잔치에서 삼손은 어떻게 했을까요? 난 나실인이니까 술을 마시면 안된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지금까지 삼손의 모습을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포도원에 들어갔고, 사자의 주검을 만졌고, 부정하게 된 꿀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실인이라는 이유로 술을 거절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이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삼손이 심심했는지 블레셋 사람들과 일을 벌입니다. 잔치가 한창일 때 블레셋 사람들이 데려온 30명의 청년들과 내기를 합니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는데 잔치가 벌어지는 일주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내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는 겁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블레셋 사람들이 풀면 삼손이 그들에게 옷을 주고, 못 풀면 그들이 그만큼의 옷을 삼손에게 주기로 합니다.

삼손이 낸 수수께끼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수수께끼인데, 이 수수께끼를 들은 사람들이 수수께끼 자체를 두고 시비를 걸지 않은 것을 보면 삼손은 괜찮은 문제를 낸 것 같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블레셋 사람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다른 방법을 씁니다. 삼손의 아내에게 남편을 꾀어서 답을 알아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너의 아버지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합니다. 명령과 협박을 받은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 여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의 아내라고 기록되었지만, 삼손과 결혼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블레셋 사람이었고 블레셋 백성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자기 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삼손의 아내라는 호칭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들리게 합니다. 결국 삼손은 이 여인을 혼자 좋아해서 결혼한 것이고, 이 결혼이 얼마나 무모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눈물로 애원하며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아내의 요구를 처음에는 자신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자의 눈물을 버티지는 못합니다. 답을 알려주고 맙니다. 잔치가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말합니다. 그리고 삼손은 그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답을 얻었음을 압니다. 그래서 삼손이 이렇게 말합니다.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18)

삼손은 아내를 가리켜 암송아지라고 하며 블레셋 사람들이 이 암송아지로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암송아지라는 단어 자체는 평범하지만, 아내에 대해서 이렇게 빗대는 것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삼손은 정말 화가 나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삼손은 내기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삼손은 약속대로 베옷과 겉옷 30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삼손이 생각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옷을 빼앗는 것입니다. 삼손은 옷을 구하기 위해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옵니다. 아스글론은 딤나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진 블레셋 성읍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첫 번째 싸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승리가 이스라엘이나 삼손이 속한 단 지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나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것도 욕심과 경솔한 행위로 벌어진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블레셋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쳤지만 이스라엘에 구원이 오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삼손은 모두 개인적인 이유로 블레셋을 공격합니다.

물론 이러한 삼손의 행동에 여호와의 영이 능력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손의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삼손의 행동은 사사로서 그의 사명과 관련이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러한 삼손의 온전하지 못한 행동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여서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옷을 건네준 삼손은 화가 풀리지 않아 아내를 처가에 둔 채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다시 딸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딸을 결혼에 참석했었던 사람 중 한사람에게 아내로 줍니다.

이렇게 삼손의 국제결혼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딤나 여인의 집안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결혼을 이런 식으로 망쳐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큰 능력을 고작 내기에 진 빚을 갚는데 사용하는 삼손에게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길들여진 인생이 되기 위해 삼손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삼손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 길들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둘째로 자신이 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러한 능력을 주셨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길들여져서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내가 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가 아님을 기억할 때 나에게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나의 힘, 나의 시간, 나의 재능, 나의 물질, 나의 능력, 나의 인생, 나의 생명까지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욕심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나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이 허락하신 목적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숨을 쉬는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내가 우상이 되어서 나를 섬기며 내 욕심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삼손을 생각해보십시오. 삼손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고통 받는 자기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를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런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나의 인생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낭비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은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큰 가능성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 인생이 말씀에 의해 통제되지 않아서 본능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삶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받은 은혜를 낭비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나의 인생이 하나님께 길들여지고 있는지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의 인생이 말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내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통제를 받으며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고 내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그러한 싸움이 있다면 길들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벌어지는 그 싸움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목자 되시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그분에게 길들여졌을 때 가장 큰 행복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과 평안은 그 분 안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통제 안에서 그분이 주인 되심을 범사에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길들여진 인생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붙들린 길들여진 양이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