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말씀을 듣는 방법
본문: 야고보서 1장 19절-21절
설교: 최 종 혁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숨쉬기 다음으로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보면 잘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잘못 알아들은 것 대문에 오해가 생겨서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만일 의사와 간호사가 수줄 중에 서로 말을 잘못 알아듣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메스를 달라고 할 때 수술용 칼이 아닌 요리용 칼을 준다면 말입니다. 의사소통의 소소한 문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일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잘 알아듣고 계십니까? 잘못 알아듣거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영적인 생명이 달려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야고보는 우리들이 여러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5-8절에서는 우리가 그런 시험을 당할 때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고, 9-12절에서는 시험 중에 필요한 지혜의 예에 대해 가르쳐주었습니다. 13-18절은 그런 시험 중에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유혹에 대해 말했습니다.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욕심에 미혹되어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절). 하나님은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자로 살게 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우리에게 19-27절까지는 ‘믿는 자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9-21절에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하고, 22-27절에서는 ‘말씀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로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19-20절에서는 듣는 것의 일반적 원리를 말하고, “그러므로”로 연결되는 21절에서는 그 원리를 말씀을 듣는 것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듣기의 일반적인 원리
19절에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새로운 주제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에게 거기서 더 나아갈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일반적인 교훈입니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7-28),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은 말의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듣는 자의 태도에 대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빨리 하십니까? 무엇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속히 하고 싶지 않습니까? “듣기를 속히 하라”는 말은 그것을 원하고 갈급해하며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것도 천천히 말을 하라거나 나중에 하라는 것, 아무 말도 하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듣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갈급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설교 중에도 누군가 일어나서 질문을 하거나 말을 하는 문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도 중간에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기를 속히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있을 때는 들어야 합니다. 주의해서 들으라는 말입니다.
“성내기도 더디하라”에서 성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화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화를 쌓아둡니다. 그것도 화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성냄’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이와 같은 ‘천천히 지속되는 적대감’에 가깝습니다. 그런 식의 분노는 자기 방어체계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의 공격에서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적대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을 방어하는데 갈급해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만 듣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분노를 통해 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화를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하나님의 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분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은 즉, 용납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19-20절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원리로서, 갈급해하며 듣고 주의해서 들으며 용납하면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원리의 구체적인 적용
이제 “그러므로”라고 연결되는 21절에서는 위의 일반적인 원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여기서는 “내버리라”는 명령과 “받으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버릴 것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인데 “더러운 것”은 더러운 옷과 같은 상태입니다. 우리를 죄악되게 만들어 더럽게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악”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그것을 우리는 넘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앞서 우리에게 가득 찬 죄를 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악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악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죄가 거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죄를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은 매일을 완벽하게 살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삶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하고 순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면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열심히 살고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전히 더러운 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말씀을 왜 또 가지라고 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도 말하지만 구원을 “이루라”고도 말합니다. 이미 받은 구원을 ‘칭의’라고 하고 이뤄가야 하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전히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말씀이 필요했고 이제는 거룩하게 살기 위해 또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온유함”은 다시 말하면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곧 온유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할 때 나타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받을 준비, 그 말씀으로 인해 자신을 바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갈급함과 주의로, 그리고 용납하면서 듣는 것은 한 마디로 ‘온유함으로 듣는 것’입니다.
19-20절에서 보여주었던 듣기의 일반적인 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갈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는 그런 자세가 잘 드러나있습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 119:147). 여러분에게는 이런 갈급함이 있으십니까? 베드로는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갓난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젖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해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한 때 갈급하신 적이 있으셨다면 다시 한 번 그 때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께 그러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둘째는, 주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듣는 자가 되어야지 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태도를 지닌다면 말씀의 맛을 잃어버립니다. 말씀이 계속해서 똑같은 말만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많은 말들과 더욱 구체적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용납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살아있고 활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로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을 내기도 합니다. 나를 방어하려는 사람으로서 말씀이 나를 찔러 쪼갤 때 그것을 방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고 적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런 태도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책망하실 때 그것을 쳐내려고 하지 마시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인지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용납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말씀으로 태어나서 말씀대로 사시길 원한다면 위와 같이 하십시오. 찬양집회에서 ‘주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는 앵무새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성경에 다 기록해 두셨습니다.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그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