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본문: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자: 조 정 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델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모습을 연상하는데 기도는 그것 이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로서, 소리를 내든지 내지 않든지, 눈을 감든지 감지 않든지 믿는 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삶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새벽 아직 미명에 기도를 하러 가셨고(막1),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무리와 작별하고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으며(막6), 세례를 받으실 때(눅3), 제자들을 세우실 때(눅6), 잡히시던 날 밤에도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마26). 예수님은 바쁜 삶 속에서도 틈날 때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눠야 하겠습니까.
또한 사도들이 성령을 받게 전에 한 장소에서 모여서 기도했던 모습(행2), 베드로와 요한이 시간에 맞춰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고,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그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의 시작은 장로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중에 주신 명령으로 비롯되었고,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많은 이들이 삶 중에 기도로 깨어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성화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화(聖化)’라는 것은,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봤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로 인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 하나님에 대해 산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이제는 죄에 따라 살지 않고 그와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것, 그것이 성화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율법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죄에서 멀어져서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과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화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셨으니 나는 전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전혀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둘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성화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 “지혜가 부족하거든…하나님께 구하라”(약1:5),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본문 말씀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9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는 등장하는 이와 같은 접속사를 주의하십시오. 이 말은 그 위에서 말하고 있는 5-8절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5),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7) 등 기도의 잘못된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5절의 외식하는 기도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를 말합니다. 특별히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기도를 비판하셨는데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에 나가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7절의 이방인들이 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주문을 외우듯이 달달 외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구하던 기도, 의미 없는 형식적인 기도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외식적인 기도나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9절의 “이렇게 기도하라”는 표현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오해해서 그들의 공적인 모임에서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는 말은 이 기도문을 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7절에서 비판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 기도의 모델(또는 가이드)이니 이와 같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항상 이렇게 해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이런 기도가 너희의 기도생활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라’,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너희를 단련시켜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연습하고 노력하며 순종해야 하는 예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에 기도생활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게으르기 때문이고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다른 하나님의 말씀들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명령보다 죄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이 명백한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의지적으로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날마다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일곱 가지 명령이 등장합니다(9-13절). 그에 앞서서 9절에서 이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말을 두 가지 표현으로 나누면 ‘우리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과 주님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호칭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고 표현했던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합니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했을 때 그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4-7). ‘아바’라는 표현은 ‘아빠’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함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가 지금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분이 누구신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날마다 교제할 수 있는 이 분은, 지금 일상의 매순간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사귐을 가지고 있는 이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성경은 호세아와 그 아내 고멜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해, 호세아에게 창녀 중에 아내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고멜을 데려와 함께 살다가 그녀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또다시 그녀를 데려오라고 명하십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고 대항하던 자, 어둠가운데 있던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보혈로 죄의 더러움을 씻어내시고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3:1).
하나님은 친밀한 아버지일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위대하시고 광대하시며 위엄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겸손히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와 친밀하시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위엄 있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일곱 가지 명령들을 보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인격, 권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망령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사29:2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받으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12:28).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기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가 참 많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92:13-3),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1:5),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3:21),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빌4:20),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벧전5:11), “그의 아버지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즉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아멘”(13). 여러분이 날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시작과 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름을 높이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높여드리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10),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하는데 이것은 장차 올 나라이며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을 통해 이루시는 나라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 18:36),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는 말씀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순종하는 나라, 장차 올 나라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경배하는 성도들을 통해 현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이뤄지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세상의 왕으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의 기도에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 관심 있는 것을 구하는 기도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필요, 우리의 소원과 계획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의 사람들을 우리가 섬겨야 할 왕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재 당한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기만 급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 이 기도는 앞의 두 명령과 비슷합니다. 왕의 이름을 높이고 왕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에 이어, 왕의 주권(통치력)이 임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모든 일에 있어서 뜻을 정해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 정해놓은 특별한 뜻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 지옥에 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표현이 62번 등장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마18:14, 요6:4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성도의 거룩함(살전4:3),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살전5:14),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벧전3:17) 등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다 이뤄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사단과 마귀의 세력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사단)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엡6:12).
이 말은 하나님이 사단을 상대하시기 힘들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욥기를 보면 사단이 욥을 시험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와서 묻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완벽한 주권이 도래할 그 나라가 임할 때까지 사단이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 이 기도는 하나님의 권세가 온전하게 이뤄질 그 나라가 임하길 원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기 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 기도에 대한 명령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세 기도 모두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처럼 기도의 모델에서도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기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무언가를 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와 반대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 여기서 양식은 먹는 음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삶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물질적 필요, 음식과 건강, 환경 등을 말합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매일매일의 필요, 숨 쉬는 공기부터 물, 음식, 돈, 건강, 마음, 생각, 정신까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8),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5),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 여러분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매 순간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한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노력해서 돈을 번다고, 물질적 풍요와 음식이 내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하나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신다면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근심없이 매일의 필요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필요가 하나님 없이는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 이 말씀 앞에는 “그리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물질적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한 가지였다면, 이제 영적인 필요를 구하는 기도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가 더 크고 더 많이 구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서 죄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죄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을 구할 때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죄 용서함을 구하는 기도의 조건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입니다. 우리는 왜 형제 자매를 용서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3).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용서를 맛본 사람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먹을 때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라고 말씀하실 때,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고 그에게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은 외식적인 기도입니다.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나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확신과 겸손한 마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13) 성경에서 ‘시험’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란’으로, 우리의 믿음 자체가 흔들릴 만큼의 혹독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러나 그 환란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넘어지고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롬5:4-5). 즉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시험의 또 다른 의미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예수님이 사단으로부터 받은 시험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3).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즉 이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만한 환경에서 건져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3) 우리를 유혹으로 끌고 가는 자는 사단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벧전5:8). 사단은 죄에 대해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죄의 종노릇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염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도록, 진리를 들었을 때 확신을 가질 수 없도록, 진리를 배웠을 때 곧 잊어버리도록 합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그런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환경을 주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이 연단되고 소망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욕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이 기도의 또 다른 의미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 어려움을 잘 감당하고 믿음 가운데서 자라나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환경을 주셨을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이 쓰고 힘든 환경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은 최고의 선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슬프고 고민해서 죽을 것 같은 환경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이니 순종하겠다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기도생활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도와 얼마나 비슷하십니까?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계획이 임하기를,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지기를, 하루의 필요한 모든 것들이 아버지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온전히 신뢰하며 구하고 계십니까? 형제자매를 용서함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믿음을 흔들만한 혹독한 환경에서 구해달라고, 환경 중에 죄의 유혹으로부터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영원히 이뤄져야 할 교제,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 뒤에는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뜻, 명령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왕이고 주인이라고 고백한 우리들이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