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생의 두 길
본문 : 시편 1편
설교자 : 최종혁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군대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무 잘하지도 말고 못하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는 말입니다. 딱 그 정도만 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군대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렇게 중간에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대립될 때 중간에 있는 것, 타협점에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균형있는 관점’이라고 하는데 많은 분야에서 그것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균형있는 관점’보다 중요한 것보다는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성경은 매우 극단적인 책입니다. 흔히 말하는 흑백논리, 양자택일의 관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책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세상에는 두 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택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적당히 중간 어딘가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말씀에서도 두 가지 반대되는 사실을 대조하면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가 있고(마 7:17-18),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준행해서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마 7:24-27). 성경의 관점을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집을 짓는 사람들인데 반석이 아니면 모래위에 짓는 것입니다. 그 중간 어디에서 다른 곳에 집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그런 양자택일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 잠언에서도 계속해서 반대되는 두 사람,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매우 극단적인 책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극단성을 불편하게 여기고 싫어해서 그냥 무시하기도 하고 다른 진리를 따르기도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시편 1편의 말씀도 이런 극단에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어떻게 극명하게 대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편은 교회 역사상 믿는 자들이 가장 사랑했던 책 중 하나입니다. 다윗을 비롯해 최소 7명의 저자가 있고 편집자가 있습니다. 시기를 보면 가장 먼저 기록된 시편 90편(주전 1410년 경, 모세)부터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126편(포로기 이후, 주전 6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까지 약 900년 간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을 누군가가 하나의 시편으로 모은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성경이 시편이고, 그 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직간접적인 예언들도 많습니다.

시편 1편은 전체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기록했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시편 1편은 매우 보편적인 진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이들이 살다가 죽었고 지금도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둘 중 하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향해 가고 있거나, 영원한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과 ‘악인’입니다. 본문 말씀은 누가 영원한 삶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영원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씀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복 있는 사람은….”(1-3절). 복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기준에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시작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며 동일한 관점을 제시하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에서 먼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절). 1절에서는 비슷한 말이 단어가 조금씩 바뀌어가며 세 번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무언가를 따르고, 어디에 서고, 어떤 자리에 앉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악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은 악인의 충고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는 말을 듣고 그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그런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길’과 ‘걷는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을 가리킵니다.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죄인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앞의 말은(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 생각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은 삶의 패턴이 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그 무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오만한 자와 교만한 자는 단순히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모욕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볼 때 우리는 선한 사람 다윗이 원수들을 향해 저주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다윗의 대적들이 오만한 자들, 즉 하나님을 적대시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죄를 행하는 자들 중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들의 생각과 행동, 어느 것 하나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꾀는 따르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으니까 괜찮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복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극단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망에 있던 사람이 생명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구원 이후에는 그런 극단적인 삶을 피해 적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설명하면서 ‘복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 익숙한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던 사람, 그 길에 서서 살아왔던 사람이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것이 즐거웠고 그것을 원했으며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삶입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을 거절하고 그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죄에서 멀어진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 그들은 대신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섯 권의 책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재밌지는 않은 책들입니다. 그렇게 딱딱하고 금지의 명령이 많은 율법책을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인데 176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편 기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구하고 있으며 그것이 꿀과 같이 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기 원하고 묵상하기 원하며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가 그렇게 말씀을 사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 있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시편119편에는 ‘주’라고 번역된 단어가 211번이나 등장하는데 이 말은 원래 ‘당신’을 가리킵니다. 나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더 알고 싶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말씀을 대하는 자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아가는 것은 즐거운 과정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인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살다가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단순히 ‘나를 섬기라’고만 하셨다면 그들은 여러 신 중에 하나로 하나님을 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분명하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그 율법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살인하지 말라”(출21:12)고 명령하시고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 같이 여겨지지만 사실 하나님은 고의성 없이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의 경우에는 예외를 두셨습니다. 도피성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자비롭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즐거움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는 묵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묵상과 명상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명상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비워내는 것이고 묵상은 마음속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즉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일지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끔씩 시간 날 때나 영적으로 힘들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밤과 낮을 제외하면 우리에게는 아무 시간도 남지 않습니다. 즉 이 말은 언제나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저 성경을 늘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온통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손가락을 베었을 때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철철 나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즐겁고 그것을 늘 생각하며 그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묵상의 목적은 성경적인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3-34).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는데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그를 조롱하는 셈입니다. 그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면서 그에 따르는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모습을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점점 죄와 멀어지고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복 있는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입니다. 어디서 씨가 날라 와서 우연히 자라게 된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시냇가에 심어놓은 나무입니다. 또한 이 나무는 뿌리를 통해 양분을 공급받아 철마다 열매를 맺습니다. 이 나무는 어떤 가뭄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겨우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 이 나무는 복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얻어, 시험이 와도 인내하고 철마다 열매를 맺으며 풍성히 자라갑니다. 그런데 시편기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에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그 나무와 같은 복 있는 사람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처음에 의도한 것을 효과적으로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나무가 원하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 잎사귀를 무성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어떤 일에 있어서 형통하다는 것일까요?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에서 멀어진 사람이고 악한 생각은 물론 행동도 하지 않으며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사업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일 리 없습니다. 그는 자식이 잘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의 소원이라면 다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뤄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소원은 사업이 잘되는 것도, 자녀가 어긋나지 않게 크는 것도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풍성한 생명에 거했던 것처럼 복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삶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루어 가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길이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들도 영원히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영원히 살기만 한다면 지겹다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영생을 맛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절). 악인의 특징은 간단히 말해 “그렇지 않다”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복 있는 자의 특징과 정반대가 됩니다. 중간 어디쯤이 아닙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 그가 악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악인은 육에 속해있는 사람, 죄에 속한 사람으로서 죄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복 있는 자가 그랬던 것처럼 악인도 다른 무엇에 비유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겨”입니다. ‘알맹이’가 아니라 ‘껍질’이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여름내 땀을 흘리며 가을에 추수를 하는 이유는 알곡을 얻기 위함입니다. 추수 이후에 알곡과 겨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는데 껍질은 가볍고 잘 날아가므로 바람이 부는 곳에 던지면 겨는 날아가고 알곡이 남습니다.

악인은 그런 겨와 같습니다. 겨가 버려지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지 않고 가치 없는 삶을 사랑해서 가치 없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절). 삶의 결과는 명확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고 그들과 하나가 된 사람의 결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관여하시고 인도하시며 그들의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6절 말씀에 대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성공한다고 말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손해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잘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시편 1편에서 두 개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두 길 가운데 한 길에 서 계십니다. 영생을 향해 있거나 멸망을 향해 있습니다. 멸망의 길에 있다면 아직은 다른 길로 옮겨갈 기회가 있습니다. 복 있는 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악한 사람이 복 있는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일 복 있는 자의 자리에 서 있지 않다면, 예수님 앞에 겸손히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복 있는 자로 칭해주실 것입니다.

지금 복 있는 자의 길에 서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 있는 자 다운 삶을 사십시오. 복 있는 자답게 악인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거짓에 속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시며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영원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사는 삶이고 그것이 복 있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