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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내 영혼의 소망
본 문: 히브리서 6장 13-20절
설교자: 조 성 훈
얼 마 전 저는 ‘내 영혼의 탄식’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육체의 고통이나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가지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더 많이 살지 못해서 오는 고통입니다. 또한 이어서 ‘내 영혼의 기쁨’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과 기쁨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영혼의 소망’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내 영혼의 소망
여 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깊은 탄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소망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때 맹세로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맹세가 흔하고 가볍지만 하나님의 맹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절대 그 공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오해하여, 축구경기에서 자신의 팀이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게임에 개입하여 승패를 좌우한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공부 못하는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하기를 기도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므로 자신이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사 도 바울의 소망은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2 -5)” 땅 속에 있는 굼벵이는 땅 속에서 그에 가장 적합한 몸으로 살지만, 땅밖으로 나올 때는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습니다. 물 속에서 살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잠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있을 때는 이 땅에 적합한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주님과 같은 몸, 빛의 속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때는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병원 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육체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시편 기자는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살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성 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 곧 믿음인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기업을 바라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기업을 하늘에 간직해두었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니 이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세도,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 리의 소망은 영광스러운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에 우리를 위해 쌓아둔 많은 기업을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엄청나게 큰 것이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와 같은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은 맹세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지만 굳이 맹세하신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6:17)”
사 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물질이 풍부하고 건강하며 출세한 사람 중에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찾기가 참 힘듭니다. 물질이 아닌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도 하나님께 모든 축복을 받은 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 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히 6:13-1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맹세하시고 이와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보증으로 두시고 아무도 변경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소망의 역할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6:19)” 우리가 이 세상의 흐름과 타락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소망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든든히 이 소망을 붙잡게 될 때 우리는 영혼의 방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믿음의 선진들도 이 땅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완전히 다른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 살 때 돈이 많았는데도 왜 천막을 짓고 살았을까요? 더 나은 하늘의 성을 바라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 러분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이 크면 나아질 것이라고, 적금을 타면 지금보다 형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기업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소망을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자식에게 소망을 두면,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물질에 소망을 두면 모두 깨지기 마련입니다. 산 너머에 희망이 있어 계속 산을 넘어갔지만 죽을 때까지 희망은 또 다시 산 너머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소망을 하늘에 간직하셨습니다.
결론
성 경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3:15). 소망을 기다리고 굳게 잡으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10:23, 요일 3:2-3).
여 러분은 이 복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매일의 고통이 그 소망의 기쁨을 상쇄시켜 버리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인 천 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아들이 장난하다가 십만 원짜리 그릇을 깨뜨렸다고 해서 화가 날까요?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 땅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 너머의 즐거움 때문에 십자가를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소망 가운데서 든든히 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