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본문: 사도행전 3장 1-26절
설교자: 조정의
성령 충만한 교회가 세워지고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셨다(행 2:43). 그들이 베푼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들이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강력한 표적이 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예시로 사도행전엔 적어도 열네 개의 기적이 나온다. 오늘은 첫 번째 기적인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이다.
예수님은 공적 사역 중에 많은 저는 자들을 일으키셨다. 이제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을 힘입어 그리스도가 베푸신 기적과 같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문구는 바로 베드로가 외쳤던 이 말이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과연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는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는가? 매일 스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사명을 따라 필요한 이들에게 반드시 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길 기도한다.
- 나면서 못 걷게 된 이(1-10)
첫 번째 등장인물은 못 걷는 사람이었다(1). 누가는 의사로서 정확하게 이 사람의 장애를 묘사했는데,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신체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 단순히 다리를 저는 수준이 아니라 걷거나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심각한 지경이었다(7).
그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나면서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1). 부모는 이 사람의 걸음마를 기대할 수 없었다. 또래 아이들과 뛰어노는 일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두 다리로 일어난다는 것, 땀나게 뛴다는 것은 정말 이 사람이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자 그 무엇보다 바라는 소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이 당시에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삶의 방식은 구걸이다(2). 입에 풀칠하며 살려면, 먹고 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다. 빌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은 가난한 자를 위해 자비를 베푸는 것을 귀한 덕목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이 많이 지나가는 길,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다. 구걸하러 가는 것마저 자기 힘으로 하지 못하고, 사람들, 아마도 친구나 가족이 그를 메고 와서 성전 문에 두었다(2).
이 사람의 나이는 사십여 세(행 4:22), 40년이 넘는 세월, 날마다 그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 사람들이 메고 문 앞에 내려놓고, 하루 종일 구걸하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가족들이 메고 가는 삶이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이었다. 오랜 세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성전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잘 알았다(10).
그는 미문이라 불리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는데, 미문은 성전의 동쪽 주 입구, 니가노르문이라 불리는 문으로 23m의 높이의 이중문으로 내부는 동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외부는 문 전체가 금과 은으로 덮인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이었다.
이 아름다운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에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며,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미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로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건강한 두 다리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왜 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은 걸까? 유대인들은 이런 혹독한 저주는 죄 때문이라 생각했고, 이 사람 역시 자라면서 자신의 죄 혹은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오명에 시달리면서 적지 않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여기 이 사람은 정말이지 남은 연수가 몇 년이든 매일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살았다. 거지 같은 인생이 아니라 정말 거지 인생을 살았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비참한 삶이었다. 스스로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그의 인생을 바꿀 능력이 그에겐 조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구걸하러 온 성전 미문 앞에서 그는 아주 특별한 사람 둘을 만났다.
- 베드로와 요한(1-12)
두 번째 등장인물은 바로 두 명의 사도들이다. 베드로와 요한(1). 때는 제 구 시 기도 시간이었고 성전에서 드리는 저녁 제사 직후인 오후 3시경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핵심 제자 중 하나로 초대 교회의 중요한 교사와 감독 역할을 담당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 초대교회 습관처럼 두 사도는 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에 올라갔고(1, 2:46), 때마침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왔다(2).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돈이나 음식 등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좀 달라고 구걸했다.
주목하여 보라! 여기서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매일 스치며 지나간 앉은뱅이에게 두 사도가 관심을 가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다가갔고, 그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다. 아마도 엎드려 구걸하던 그에게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을 너에게 주려고 하는지 똑똑히 지켜보라고 말하려고 한 것 같다.
그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기대했다(5). 보통은 엎드려서 동냥하던 그에게 특별히 자신들을 주목하여 보라고 했으니 뭔가 비싸고 좋은 걸 주려나 보다 기대했을 것이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but)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6). 앞부분만 들으면 조금은 실망스럽다. 줄 돈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반전이 있겠지. 그런데 뒷부분을 들으면 희망적이기보다는 황당하고 터무니없다. 베드로가 말한 “(그러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어서 그가 말한 것처럼 “일어나 걸으라”이기 때문이다. 돈은 없지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황당한 말을 이렇게 담대히 할 수 있을까? 의사도, 가족도, 본인 자신도 40년간 일으켜본 적이 없는 몸을 어떻게 지나가던 이 사람들이 일으키겠다고 장담하는가? 도대체 “내게 있는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가?
오늘날에도 이런 황당한 치유를 약속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치유 역사를 오늘날 자신들이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대 위로 휠체어를 탄 사람을 불러다 놓고, ‘내가 이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겠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안수 기도를 하면 정말 갑자기 일어나 걷기 시작하고 뛰면서 찬송을 부른다. 관중들은 박수치며 환호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진짜 환자였는지 알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휠체어를 타고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치유 사역자 베니 힌은 이런식의 치유 집회를 통해 연간 13억을 벌고 있다. 과연 두 사도는 이와 같은 치유 능력자였을까?
실제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이 앉은뱅이는 그냥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라와 병자라고 주장한 이름 모를 사람이 아니다. 무려 40여 년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자로 모든 백성이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았다(9-10). 그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과 함께 베드로는 그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7). 원래는 발과 발목에 힘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질질 끌려와야 하는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발과 발목에 난생처음으로 힘이 쥐어졌다.
그는 뛰어 서보기도 하고, 걸었다(40세 첫 걸음마). 사도들과 함께 처음으로 아름다운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로 들어갔다. 금지됐던 하나님 앞에 처음으로 나아갔다.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엄청 신이 난 것이다. 생전 처음 소리를 들어본 청각장애인이 눈물을 흘리듯, 아마 눈에선 기쁨의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다(8).
그는 분명히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을 수 없었던 심각한 상태였지만 사도들을 만나 걷고 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약간의 회복, 잠시 치유되었다가 재발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무능력했던 다리가 완전히 기능하는 새로운 다리가 된 완벽한 치유였다. 사람들은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9-10).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성전 안에서 함께 돌아다녔고, 모든 백성은 크게 놀라며 두 사도와 나은 사람에게 모여들었다(11). 그들은 마침 솔로몬 행각에 모였는데, 솔로몬 행각은 성전의 바깥 뜰 동편, 두 줄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있는 지붕이 덮인 현관, 회랑, 주랑으로, 예수님이 종종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신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오늘날 치유 사역자와 완전히 다른 두 사도의 모습이 나온다. 오늘날 치유 사역은 사역자를 돋보이게 하고 그의 배를 불린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그 어떤 경제적 이득도 취하지 않았으며, 충격과 놀라움에 빠진 관중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
초자연적인 치유의 기사는 표적이다. 그것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그 치유의 능력을 행하신 이를 바라보게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주목하여 보아야할 대상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고 말한 두 사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능력의 출처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후에 놀라서 모여든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아니라 표적이 가리키는 참 대상을 주목하여 보라고 말했다. 바로 그분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세 번째 등장인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은과 금이 없었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는 이것이었다.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13-26)
13-26절까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설교를 남은 시간 풀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두 가지 내용으로 베드로의 설교를 정리하여 살펴보겠다. 1) 나사렛 예수는 누구신가? 2) 그분은 무엇을 주시는가?
- 나사렛 예수는 누구신가? 그리스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나사렛 예수는 얼마 전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자칭 그리스도였다. 유대인들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그 앞에서 거부했다(13). 예수보다는 살인한 사람 바라바를 놓아 주기를 구했다(14). 결국 그를 죽였다(15). 하지만 베드로는 이 설교를 통해 바로 그 나사렛 예수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히: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밝혔다.
13절에 나오는 “그의 종 예수”, 14절에 나오는 “거룩하고 의로운 이”, 15절에 나오는 “생명의 주” 모두 약속된 메시아의 호칭이다. 베드로는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는가?
고난: 먼저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난받으셨다.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다(18).
부활: 또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셔서 예수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그분이 참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셨다(15, 13).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었다(15).
마지막으로 그들이 보고 아는 이 앉은뱅이를 성하게 하신 이름 역시 예수 그리스도였다. 모든 사람 앞에서 완전히 낫게 하는 능력, 그 치유를 가져오는 믿음을 나게 하는 분(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예수는 참 그리스도셨다(16). 이사야 35장 6절에 약속된 그리스도로서 저는 자를 사슴 같이 뛰게 하셨다.
- 그리스도는 무엇을 주시는가?
그리스도는 단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과 능력만 주지 않으신다. 만일 그렇다면 앉은뱅이는 성한 두 다리를 얻고 평생 죄를 지으며 살다가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불못에서 고통받으며 차라리 성전 문 밖에서 구걸할 때가 행복했다고 회상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인 영혼의 질병을(죄) 치유하는 믿음과 능력을 주신다.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19절을 보라. 회개하고 돌이켜 무엇을 받는가? ①죄 없이 함을 받는다. 그들은 알지 못하여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였다(17). 하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그 크고 무서운 죄까지 모두 지워주신다. ② 주 앞으로부터 이를 새롭게 되는 날을 받는다(19). 새롭게 되는 날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회복된 나라를 주신다. ③그리고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받는다(20).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다는 것은 회복된 나라를 다스릴 왕의 귀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그 나라 왕이신 예수님은 재림하여 죄 사함 받은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의 성취다(21)
베드로의 설교는 일차적으로 청중인 유대인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가 무엇을 주시는 지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단지 유대인에게만 이런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도 주신다. 22-24절 말씀은 분명히 유대인에게 주신 약속이지만(모세, 사무엘, 모든 선지자), 25절을 보면 베드로는 더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에 따라 땅 위의 모든 족속에게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한다(25). 하나님이 그 종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말을 듣는 자에게,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26).
매일 스치는 사람들,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 진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그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하는 복을 주신다. 그래서 나면서 죄인인 자들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황금 문을 통과하여 걷고 뛰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신다. 복의 절정은 이것이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사 영원히 함께 다스리고 친밀한 앎을 누리는 영생의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 말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복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줄 수 있는 복이다.
당신에게 무엇이 있는가? 당신에게 있는 그리스도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주시는지 알고 있는가?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나면서 죄인인 그들에게 왜 말하지 않는가? 그들에게 다가가 주목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왜 말하지 않는가? 왜 회개하고 돌이켜 이 놀라운 복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이 땅에 존재한다. 거절을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멸망 받을 것이다(23).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과 믿음을 확신하며 담대히 그분을 증언하라.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화려하고 호화로운 바티칸에 들어가며 충격을 받았다. 교황 이노센트 2세를 만났는데, 그가 많은 돈을 세면서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아퀴나스는 말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없나 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시선이 땅에 고정되고, 사명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한다. 빛은 어둔 세상을 비춰야 한다. 저는 자를 사슴같이 뛰게 하는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환하게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자.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담대히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