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본문 : 디모데후서 1장 1-5절

설교자 : 이병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또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계속 반복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시작을 만나고 끝을 보내면서 우리가 할 일은 끝은 잘 마무리하는 것이고 시작은 더 의미 있게 출발할 수 있도록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를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전해지는 말씀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역사하셔서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디모데후서 첫 번째 시간, 편지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내가 쓴 편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본다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확인하게 될까요? 먼저 살펴보는 것이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지의 서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를 살펴보면서 계속 언급했던 부분이고 성경의 이름부터 디모데후서이기에 누구의 편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편지를 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고 편지를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편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이나 상황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편지를 쓰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글씨 쓰는 연습을 하려고 편지를 쓰지는 않습니다. 가끔 어린 아이들이 마치 글씨 연습을 하는 것처럼 낙서 같은 편지를 쓸 때가 있지만 그 경우에도 나름의 목적이 있습니다. 편지에는 편지를 쓴 사람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고 편지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편지를 쓴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겪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는 목적이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의 상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편지를 썼느냐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것을 이야기할까요? 분명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며 교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후손들이 본다면 어떨까요? 편지의 내용을 보면서 교회가 겪었던 코로나의 상황을 생각하고 바울이 편지를 쓴 목적과 교훈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디모데후서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대략 2천 년 전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수고가 필요합니다.

참 감사한 것은 우리가 직접 할 수 없는 하기에 어려운 여러 가지 추가적인 수고들을 대신 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연구의 결과를 가지고 편하게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알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정보들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기록하고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디모데후서를 기록합니다. 디모데는 여전히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고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쓸 때는 자유인으로 편지를 썼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후서를 쓸 때는 감옥에 갇힌 상황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힌트가 성경에 나옵니다. 1장 8절을 보면, “주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말하고 있고 1장 16절을 보면,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갇혀있고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1차 투옥이라고 하는데 사도행전 마지막에 기록된 것처럼 집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집에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택연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갇힌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2차 투옥은 진짜 감옥입니다. 가택연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은 천장에 빛과 공기가 들어오는 구멍이 있는 음침한 지하 감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상태로 있었고 외로움과 추위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상황은 네로 황제의 박해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 화제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에게 돌리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을 오락으로 생각했던 잔인한 인물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씌운 다음에 개들을 풀어서 찢어 죽이도록 했고, 횃불처럼 밤을 밝히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십자가에 묶어서 태우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이런 극심한 박해 가운데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그의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좀 새롭게 와 닿는 1절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죽음을 앞둔 바울이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삼킬 수 없는 생명,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생명의 약속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주는 생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바울에게 무엇보다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은 복음이 생명을 약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이 땅에서나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나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 참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사도가 된 바울은 복음의 신실한 일꾼으로서 생명의 약속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갇힌 자가 되어서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어떤 것으로도 취소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그 안에 있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갈 길을 마치고 자신에게 주어질 면류관이 기다리며 이제는 남은 자를 생각합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 사도 바울의 삶은 곧 끝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죄수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는 곧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끝납니다. 하지만 복음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이후에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음을 왜곡하는데 열심인 거짓교사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지만, 교회를 박해하는데 열심인 네로 황제의 폭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바울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의 끝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지만 그 끝에서 시작을 바라봅니다. 또 다른 시작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데 생각한다는 표현입니다.

3절을 보면, “너를 생각하여”, 4절에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 5절에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렇게 바울은 반복해서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여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편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서 바울이 생각하는 디모데를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디모데, 디모데는 바울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는 감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은 밤낮 기도를 합니다.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자신이 청결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 적부터 대대로 섬겨오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나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마음인지, 어떤 느낌인지 잘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생각하고 밤낮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게 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연애할 때도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감사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이 무뎌져서, 보는 눈이 어두워서 그런 걸까요? 그만큼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제목이 되었고 그것이 단순히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기도 가운데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의 어떤 점이 바울에게 있어서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걸까요? 디모데가 무엇이 그렇게 뛰어났기에, 무엇을 그렇게 잘했기에 도대체 디모데가 어떻게 했기에 바울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요? 다시 말해,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의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잠시 옆에 두고, 두 번째를 살펴본 후에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는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다.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여기 나오는 디모데의 눈물은 아마도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디모데가 흘렸던 눈물일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언제 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디모데가 흘린 눈물을 보면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그 마음을 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디모데를 만나면 기쁨이 가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기쁨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만나면 나에게 기쁨이 가득해집니다. 저 사람이 웃기는 사람이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만나면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여러 가지 안 좋은 현실과는 관계없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면 기쁨이 가득하게 되십니까? 유명한 사람이나 인기 스타를 만나면 기쁨이 가득해질까요?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사람, 여러분에게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현실은 어떻습니까?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힘든 사람이 많은지 되도록 피하고 싶은 사람, 안 만나고 싶은 사람, 같이 있으면 피곤한 사람, 내 마음에 어려움을 주는 사람, 그렇게 기쁨이 되는 사람보다는 어려움이 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나는 잘 모를 수 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바울에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다 아시기에 우리의 모난 부분과 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기쁨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왠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디모데가 바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고 성향이나 하는 일이나 마음이 잘 맞아서 바울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라서 디모데가 바울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잠시 옆에 두었던 질문을 다시 꺼내봅니다.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의 감사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디모데가 착해서 디모데가 말을 잘 들어서 디모데가 맡겨준 일을 잘해서 그런 외적인 것들이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습니다.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 그 믿음이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있는 믿음의 결과가 바울의 감사가 되었고 바울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디모데가 뭔가를 하고 안하고 말을 잘 듣고 안 듣고 인격적으로 좋고 나쁘고 이런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 속에 있는 믿음, 그 믿음이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냐?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에게 감사의 제목이었고 기쁨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며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지금의 디모데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으로 디모데가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입술의 고백만으로 거짓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진실한 믿음을 가진 것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고 때가 되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은 여러 가지 핍박이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결단하며 살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을 주목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우선되어 하는 것은 내 속에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 다른 사람에게 감사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먼저 거짓 없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생명의 약속을 가진 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외적인 행위와 믿음이 없는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오히려 잘못된 만족과 교만함을 부추길 뿐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피고 내 속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 생명이 있는지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감사가 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까? 무엇보다 당신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압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디모데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가 처음부터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빚으셨기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울의 눈높이에 따라 디모데를 보고 디모데를 판단한다면 디모데는 늘 부족한 사람이고 늘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사람이고 늘 걱정거리이고 늘 기도제목이고 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감사와 바울의 기도와 바울의 칭찬과 격려가 있었기에 디모데가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서 자라갔고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고 서로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성장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볼 때 감사의 제목을 되기보다는 간구의 제목이 될 수 있고 근심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쁨이 되기보다는 불평과 한숨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허락하신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능력 안에서 그 믿음이 자라도록 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자라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기다려주고 격려하며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간다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에 대해서 먼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먼저 기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해서 먼저 믿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당신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어떤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