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본문 : 디모데후서 1장 6-10절

설교자 : 이병권

 

디모데후서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갇힌 자가 되었고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바울은 지하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복음을 위해 수고할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디모데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다시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생각했던 바울은 이제 디모데가 생각하게 되길 원합니다.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디모데가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나오는데 바울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디모데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가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여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첫 번째 편지에서 디모데의 은사에 대해서 권면을 했었습니다.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은사, 은사에 계속 불을 짚이라고 또다시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은사에 대한 사람의 책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믿는 자에게 영적인 재능인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은사를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은사를 계속 사용하고 개발함으로 은사가 계속 불타오를 수 있도록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은사가 나타나고 개발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어떤 분량으로 받았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은사에 계속 불을 붙이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거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나는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 지는 모습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점검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내 은사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나? 잘 사용하고 있는 건가?’ 다시 뜨겁게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울이 디모데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 디모데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했던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생각해야 했던 것 우리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여기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영’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기 영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 견해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번역된 것처럼 마음으로 내적인 태도로 보는 견해가 있고,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수의 견해가 성령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와 연결해서 생각하기에 더 자연스럽고 7절에 주신 것이라고 말할 때 시제가 과거입니다. 과거에 주셨던 것을 말하기에 성령이 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성령의 열매와 관련지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는 두려움을 버리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시는 그 성령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입니다. 성령은 능력의 영이시기에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어진 은사로 섬길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능력으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에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시고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또한 성령은 절제의 영이기에 우리가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적절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은사를 주셨고 그분의 사랑으로 절제함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디모데의 상황을 생각하면 바울의 권면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기에 디모데는 어땠을까요? 디모데의 나이는 어렸고 마음은 여렸고 더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 디모데에 대해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사실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도 두렵습니다. 말씀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 잘 전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도 문제없이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낙심되기도 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데 저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방해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상황이 다르고 겪는 어려움도 차이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분도 이런 방해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해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섬기려고 할 때 다양한 방해를 만납니다. 그것이 두려움이 될 수 있고 아니면 게으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관심이 될 수도 있고 이기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다양한 연약함이 우리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럴 때 다시 생각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주셨기에 그 모든 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을 버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했던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무사히 마친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여러분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맡겨진 일을 계속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며 여러분이 교회의 한 지체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령님이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9, 10절에서 보겠습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복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를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구원의 계획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고 또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이상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주셨다는 것은 ‘나 너 좋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너와 함께 있을게’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셨다는 것은 그 생명을 희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망은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비참한 운명을 요약합니다. 사망, 영원한 심판은 절망입니다. 너무도 슬프고 끔찍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사망을 무력하게 만드시고 아무런 효과가 없도록 의미 없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망이 마땅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망이 아니라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셔서 듣게 하시고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 예수님을 주셨고 복음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선물 꾸러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포인트는 선물의 내용은 아닙니다. 선물 꾸러미에 무엇이 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인트는 어떻게 입니다. 그 모든 선물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선물 꾸러미를 받는 방법, 신청서를 작성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지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눈치가 빠르게 먼저 준비한 사람, 혹은 선착순으로 받게 될까요?

9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우리가 뭔가를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하신 일이고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선물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셨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한 번 상상해보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하면서 마음이 어땠을까요? 어떤 마음일까요? 복음의 진리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말할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비록 자신은 감옥에 갇혀있지만 그의 마음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뜨겁지 않았을까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크기를 생각하며 마음이 벅차오르지 않았을까요? 이 땅에서 삶은 곧 끝나겠지만, 그 후에 펼쳐질 또 다른 시작 새로운 세상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그 영화로운 삶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도 바울이 받은 것, 여러분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주신 것 맞습니까?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로 복음을 주셔서 믿게 하셨고, 은혜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을 주셨고, 은혜로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사로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받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땅에서의 남은 삶을 살아야하겠습니까?

결론은 8절입니다.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복음에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당시 복음은 사람들에게 배척되었고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거절되었습니다. 복음은 갈릴리 어부들과 천대 받는 자들에 의해 전파되었고 나사렛 시골동네 출신의 실패한 선지자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주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바울은 주를 위해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 말씀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라고 되어 있는데, 의역한 표현입니다. 직역을 하면, ‘그분의 갇힌 자’, ‘그분의 포로’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울은 지금 ‘로마의 죄수’, ‘로마의 포로’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범죄자입니다. 사형수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의 포로’가 아니라 ‘예수의 포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주님께 사로잡힌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포로가 되어 세상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참 자유를 얻어서 주님께 매여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포로가 되어 당하는 고난과 수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어려움을 만나든지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좇아서 복음을 전하며 그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는 고난의 길이 참으로 복된 길이기에 자신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 길을 따라오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정말 권하고 싶은 삶, 어떤 삶입니까? 여러분은 자녀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비록 나는 힘들고 고생하고 어렵게 살지만 내 자녀는 잘 살았으면 좀 더 잘 살고 좀 더 누리고 좀 더 편하고 할 수 있으면 고난이 없는 길을 갔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너도 고생 좀 해봐라 너도 한 번 제대로 당해봐라 이런 마음으로 자녀의 등을 떠미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안다면 정말 복된 삶이 뭔지 안다면 그런 확신이 있다면 자녀에게 고난의 길을 권할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지만 참으로 복된 길이기에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걸어간 길을 너도 따라오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지금 그 길을 권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의 길을 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디모데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그 귀한 선물을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도 크고 놀랍기에 그 은혜가 우리 마음을 붙잡아서 이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로 이 길을 가는 중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나의 부족함 때문에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나 세상의 문화 때문에 주저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믿는바 주님이 너무도 귀한 분이시기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에 그냥 감추고 덮어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을 내 삶으로 드러내며 주님을 높이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의 가정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이 만약 코로나 바이러스를 정복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특별히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치료를 받아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면역이 생긴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다들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데 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왜 마스크를 쓰지 않습니까? ‘저는요. 코로나로부터 안전한 사람입니다. 코로나를 정복한 사람으로부터 치료를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날 치료해주신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아! 그거 몰라도 돼요. 비밀이에요.’ 이러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으로 우리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죄로부터 우리를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죄입니다. 하지만 벌거벗은 것과 같은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가려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며 삽니다. 주님의 포로가 되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주신 새로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