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여기 있는 이유

본문: 디모데전서 1장 3-11절

설교자 : 이병권

 

여러분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있을 때, 혹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엄마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나 혼자 아빠로서 있을 때, 회식자리에서 다들 술에 취해있는데 나 혼자 맨 정신으로 있을 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서 “여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살고 있는지 그 목적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어진 역할에 대한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생각하면서 내가 속한 곳에서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게 되면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디모데도 그러했습니다. 디모데는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알 때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디모데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3-4)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 디모데에게 “여기”는 에베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짧은 인사를 전했고 그리고 바로 자신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말합니다. 디모데가 여기 있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었는데 디모데는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했던 일 하나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신화와 족보에 정신이 팔려서 그것에 몰두하는 일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이들이 하는 일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는 이유였습니다.

여기 말씀에서 다른 교훈을 가르친다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전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문제와 비슷한 문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 형제들이 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가 진리를 떠나 다른 복음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지금 에베소 교회의 상황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들은 신화와 족보를 내세웠는데 신화와 족보를 통해 자신이 하는 일을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신화와 족보를 나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면 건국신화들이 접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세워진 과정을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나라가 특별하게 시작되었고 뭔가 다르다는 것을 전하려고 합니다. 곰이 사람이 되고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하는 신화를 통해 나라의 정당성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족보도 그러합니다. 이름 있는 조상과 나를 연결시켜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의 후손인지를 말하면서 내가 권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만 일으킬 뿐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이지, 논쟁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4절 말씀에 “경륜”이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데,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청지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청지기의 직무나 책임, 맡겨진 일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면 하나님의 계획과 다스림,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예를 보면, 고린도전서에는 맡겨진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차이가 있지만 거짓 교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맡겨진 일로 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변론을 내는 일입니다.

정리하면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의 일을 막음으로써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사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사명입니다.

여러분에게 “여기”는 어디입니까? 가정, 교회, 학교, 직장, 여러분이 그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여러분이 속한 곳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사명이 주셨습니까?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자로서 다른 교훈을 바로잡고 진리를 전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여기에 계십니까?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여러분은 유평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곳에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잃으면 그 때부터 죽은 것입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목숨이 아니라 사명을 잃었을 때 죽는 것입니다. 살긴 살지만 사명을 잃고 내가 왜 사는지 모르고 내가 해야 할 일,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 관계없이 산다면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닙니다.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살 때 정말 내가 살아있음을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 일을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5)

우리 성경에 “교훈의 목적”이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교훈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여기 말씀에서 “교훈”을 원래 의미대로 번역하면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명령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명령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목적은 사랑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이 에베소에서 감당해야 했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목적이 사랑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사명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목적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이 목적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예로 누군가가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그 일로 인해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사랑 없이 일하는 경우, 그 사람이 일을 하면 할수록 성도들은 더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없기에 그 방향이 사랑이 아니기에 그릇된 목적을 가졌기에 작은 일에도 문제가 되고 안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물론, 본인도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러한 문제를 막아줍니다. 사랑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올바른 목표를 향해 바르게 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목적,사랑입니다.

그럼 정말 사랑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5절에 나오는 사랑이 삶의 목적이 되면 가능합니다.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말씀의 구조를 잘 생각해야 됩니다. 수학으로 생각해서 괄호를 사용하면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괄호로 묶습니다. 그렇게 되면 괄호가 꾸며주는 말이 사랑이 됩니다. 마음과 양심과 믿음, 이 세 가지 덕목에서 나오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덕목이 각각 사랑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에서 나와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할 때 우리의 목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죄가 들어 있다면 그 일을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다면 거짓으로 그 일을 하고 있다면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사랑이 목적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있던 거짓 교사들은 사랑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헛된 말에 빠졌고 잘못된 목적으로 일하며 문제를 일으킵니다. 스스로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6-7)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르려고 합니다. 또 어떤 자들은 그와 반대로 율법을 버리고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8-10)

율법은 선한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달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격 미달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교개혁가인 루터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자기 의를 부수는 강력한 망치와 같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율법을 통해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낮아지고 두려움에 지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분의 복된 아들,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봤듯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문에 바울이 열거하는 죄인들의 목록을 보면 이 목록은 십계명에 대응하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죄와 사람에 대한 죄로 나눌 수 있고, 사람에 대한 죄들은 부모, 살인, 간음, 도둑질과 거짓,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율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율법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복음과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11)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복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2절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이 디모데에게 있어서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에게 있어서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내가 여기 있는 이유, 그의 사명은 복음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삶의 이유는 복음입니다. 감옥에서 있든지, 매를 맞든지, 굶주림을 당하든지, 핍박을 받든지, 위협을 당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바울은 그가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위해 삽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으로 삽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사랑하여 교회를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주님을 위해 삽니다.

바울은 그렇게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았고 그의 삶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사명을 위해 사랑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다음 주에 이어지는 본문에서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여기 있는 이유와 목적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사명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목적, 사랑입니다.

그럼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생각했을 때 특별히 여러분이 생각하게 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에게 마음이 쓰이는 “여기”는 어디입니까? 교회입니까? 가정입니까? 아니면 직장입니까?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생각되는 곳이 있습니까? 그곳에서 주님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내가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배우자에 대해서 그 역할을 잘 하지 못하고 소홀히 하고 있다면, 배우자를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나를 그 자리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로서 자녀를 위해 우선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녀가 방황하고 있는데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데, 부모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니면 자신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그렇게 자녀를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이 목적이 되어서 자녀에게 꼭 필요한 말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냥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누군가 하겠지! 다른 사람이 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렇게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작은 일이라도 좋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함으로 교회를 사랑함으로 형제, 자매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작은 실천들을 통해서 주님이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내가 만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을 믿는 자로서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전해야 할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감당하면 피곤할 수 있습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이 들어가고 나의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냥 지내는 것보다 힘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수고를 통해서 보람을 느끼며 주님 안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내 삶의 이유를 알고 그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살아있게 하고 더 풍성한 삶으로 가꾸어가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주님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서 내가 여기 있는 이유, 그 사명에 따라 나에게 맡겨진 일 그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목적을 잃지 마십시오. 사랑이 목적입니다. 사랑으로 그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이고 내가 여기 있는 목적입니다.

여러분, 사명을 잃는 것은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잃는 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일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