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은 그리스도만 따르십니까?

본문 : 골로새서 2장 8-23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부터 이 주간,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말씀은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골로새 성도를 권면하신 말씀으로,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온갖 교묘한 말과 헛된 속임수에 속지 말라는 강력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의 첫 시작부터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명령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8절). 

당시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있었는데, 특히 거짓 가르침의 위험이 각 교회마다 도사리고 있었습니다(예: 갈라디아 교회).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바울의 영향을 받은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와 그 북쪽 지역인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 역시 거짓 가르침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습니다(갈라디아와 멀지 않은 지역).

거짓 가르침의 위협은 교회 안팎에서 불어닥쳤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거짓 가르침에 속거나 심지어 전파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지역에 각각 편지를 쓴 바울은(4:16),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그들에게 주기 원했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실히 마음에 새겨넣기 원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당신은 그리스도만 따르십니까?

여러분, 거짓 교사의 교묘한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묘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이것을 더하면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복음에 무언가를 추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추가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구약 시대 옛 언약의 백성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해야 했던 것처럼(수 24:14), 오늘날 새 언약의 백성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추가로 우상을 들였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영적 간음으로 보시고 무섭게 심판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죄를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왜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닌지 그 원리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8절). 그리고 실제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헛된 속임수에 그리스도 외에 무엇이 추가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16-23절). 다음 주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는 것으로 우리가 충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겠습니다(9-15절). 오늘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며 혹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추가된 것은 없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1. 그리스도 + 어떤 것 ≠ 그리스도(8절)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 외에 추가하려고 했던 어떤 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였습니다. 바울은 “누가”라는 말을 통해 특정 거짓 교사를 지칭하기보다 누가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거짓 가르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 때문에 혹시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발끈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철학을 비롯하여 성경 외의 모든 세상 학문을 거짓 가르침으로 몰아세운 것이 아닙니다. 뒤따르는 “헛된 속임수”가 “철학”을 보충 설명합니다. 바울이 말한 거짓 가르침은 헛된 속임수가 들어 있는 세상의 지혜, 지식, 가르침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체계에서 나온 전통과 철학입니다.

철학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철학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을 부정하는데, 하나님 없이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도 없고, 죄도 없으며 당연히 구원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모범이 되는 영웅이며 그분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배우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의 질을 가져다준다고 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와 함께 진화 철학을 받아들이려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유신 진화론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만물이 생겨난 현상을 설명하는 진화  철학의 설명을 받아들입니다(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셨다고 주장).

문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창세기 1장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요 1).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말씀으로서 구약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셨고 특별히 창조 기사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면 왜 유신진화론자들은 진화 철학을 받아들일까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생겨난 현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는 진화 철학이 더 그럴듯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인정하되 추가로 진화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진화 철학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떨어뜨리며, 죄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합니다. 헛된 속임수가 포함된 철학은 결국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바울이 8절에 말하는 것처럼 결국엔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가르침과 전통을 따르는 것이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 미신적인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말은 세상에 속한 요소나 원리들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악한 영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사람이 만든 전통이나 미신적이고 세상적인 원리를 더하여 따를 수 있습니다. 가령 손 없는 날 이사를 하거나 궁합을 보거나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 등 말입니다. ‘좀 조심하면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진실로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속는 헛된 가르침 중 하나는 심리 철학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거기서 사용하는 철학 사상에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부정하는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가령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특징을 관찰하여 그 결과를 분석하는 건 아이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결과를 해석하는 심리 철학이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아이의 인권을 주장할 근거가 미약합니다. 죄를 부정하기 때문에 아이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의 원인을 환경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훈계와 매는 내버리고, 하나님이 경고하신 자기 사랑을 부추깁니다(자존감).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삶의 변화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찾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심리 철학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답을 찾는 데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심리 철학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과 그 마음에 대한 세상적인 설명을 함께 움켜쥐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그 중심을 아시는 그리스도와 더러운 마음을 씻어 새로운 마음으로 바꾸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그리스도 그 외에 하나님에 반하는 그 어떤 것을 추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만 더해도 물 전체의 색깔과 성격이 변하듯, 영혼의 목마름을 영원히 채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수에 그 어떤 것을 더해도 그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그 어떤 지식과 가르침을 더하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약 4:4).

2. 그리스도 + 어떤 것 = 헛된 속임수(16-23절)

그러면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헛된 속임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도로 외에 그들이 더한 “어떤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20절을 보면 그들은 “세상의 초등학문”(8절)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은 그들이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세상적, 미신적 규례에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 규례는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안에 감추어진 모든 지혜와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더하여 무언가를 추가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은 두 가지 큰 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유대교, 둘째는 이교도입니다. 

먼저, 유대교입니다. 유대교가 어떻게 거짓 가르침이 되는가?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섬기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가운데 기록된 절기(안식일, 초하루), 제사,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한 규례 등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것이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방법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7절 말씀처럼 그 모든 것들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의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몸” 다른 말로 “실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오시고 나서 각각의 절기, 제사, 규례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5).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십니다(요일 2:2). 초하루를 비롯한 각 절기마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화목을 확증했던 제물처럼 예수님은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제사와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영원한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그리스도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림자인 절기와 제사, 규례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21절 말씀처럼 붙잡지 말아야 할 것, 먹지 말아야 할 것, 만지지 말아야 할 것 등의 수많은 규례를 하나님이 주신 계명 외에 더해가면서까지 강력하게 율법과 그 율법과 관련된 사람이 만든 전통을 철저히 지켰습니다(예: 안식일 규정).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유대교가 왜 그토록 초대교회 시대 이방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유혹과 위협이 됐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신약시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종교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유대 민족의 시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가졌고, 하나님께서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 일하신 역사와 말씀하신 경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성도나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가 골로새 교회에 있었다면 충분히 이런 식의 유혹과 위험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지만 안식일 규례는 웬만하면 지키는 게 좋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화목 제물이 되셨지만, 초하루와 유월절에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이 내려질지도 몰라.’ 

유대교를 전혀 모르는 이방인 성도가 ‘오늘 저녁엔 가족들과 돼지고기 파티를 열어야겠어’라고 말하면 옆에 있던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가 “형제가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셨어. 뭔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나 같으면 안 먹겠다.”

이렇게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가미된, 결국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 이단으로 변질될 위험이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흘러들어온 사상으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했습니다(16절).

두 번째로 골로새를 위협한 거짓 가르침은 이교도에서 흘러들어왔습니다. 18절을 보면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가 나오는데 이는 후기 유대교에서도 발견되지만 이교도의 문화에서 주로 발견되는 사상입니다. 꾸며낸 겸손은 다른 사람 앞에서 연기하는 가짜 겸손을 뜻하기 보다는 오랜 금식이나 수행을 통해 남들 앞에서 종교심이 깊어 보이도록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천사 숭배는 신에게 간청하고 요구할 때 신과 인간의 중보자로서 천사를 높여 섬기는 것입니다. 이교도들은 특별히 질병을 고쳐달라고 신에게 요구할 때 천사를 부르고 숭배했습니다. 

오랜 금식과 고행, 영적인 존재를 불러 교접하려는 격렬한 행위는 급기야 초자연적인 계시나 환상을 추구하는데,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래서 이교도들은 “그가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했습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미신적이고 주관적인 진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던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 신을 숭배하는 시대였고, 도시마다 도시를 수호하고 시민들이 섬기는 신이 있었습니다(에베소, 아데미 여신). 이교도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받은 골로새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교도의 사상을 혼합하려는 유혹과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골로새 성도들이 제우스나 포세이돈을 섬기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교도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이교도에서 강조하는 금식이나 힘든 수행을 강행하려는 유혹, 하나님께 병 고침이나 다른 간청을 드리기 위해 지금의 가톨릭이 하는 것처럼 중보자로서 천사를 중요하게 여기려는 유혹,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나 환상을 추구하고 마치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처럼 자기가 본 것과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계속해서 자랑하고 말하고 싶은 유혹.

이러한 유혹들은 사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자리를 위협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별처럼 많은 천사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자리를 조금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금식과 수행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우리의 행위는 조금도 더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환상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하고 분명한 계시, 기록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이 가리키는 성육신 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압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의 은혜와 진리와 영광을 온전히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교도 사상은 아무것도 그리스도에게 더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온전히 이루신 것에 무언가를 더해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은 기독교로 변질시킬 뿐입니다. 바울은 “아무도” 그런 것들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했습니다(18절).

그러면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하려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뭔가 우리의 영적인 삶에 효과가 있을까요? 우리를 새롭게 변화 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3절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자의적인 숭배, 진실되지 않고 꾸며낸 경건, 거짓 겸손, 몸을 괴롭게 하는 것에는 쓸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육체 따르는 것,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옛 자아를 통제하고 막고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유대교나 이교도 사상을 기독교에 더하면 뭔가 남들이 보기에 대단해 보일 수 있습니다. 오랜 금식과 수행을 하면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철저히 규례를 따르고 율법을 준수하면 얼마나 대단해 보입니까? 환상을 보고 영적 존재인 천사를 예배하면 얼마나 신령해 보입니까?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된 열심과 겸손과 경건을 만들어낼 뿐 인간의 진짜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골 1:19-20).

모든 거짓 가르침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거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19절에 머리와 몸의 관계로 비유했는데, 만물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과 연결된 온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몸된 교회에게 마디와 힘줄로 공급하고 연합하여 자라게 하시는데,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머리와 몸의 연결 된 주요 혈관, 마디, 힘줄 가운데 하나만 끊어져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딱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병들고 결국엔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온전히 붙어있지 않으면 교회는 병들고 죽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5).

골로새 교회는 이처럼 헛된 속임수로 유혹하는 철학 구체적으로 유대교와 이교도에서 흘러들어온 사상에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추가하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적이고 미신적인 종교, 사람이 만든 전통과 가르침을 따르게 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는 거짓 가르침에서 자유로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을 위협하는 진화 철학, 심리 철학, 물질주의, 자유주의 철학과 같은 가르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목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온갖 세상적 가르침을 성경과 섞어 가르칩니다. TV나 유투브를 통해서도 수많은 거짓 가르침이 쏟아져나옵니다. 돈이면 다인 것처럼, 외모가 최고의 우선순위인 것처럼, 내가 만족하는 삶이 참된 삶인 것처럼, 남들이 칭찬하고 인정하면 그게 남는 삶인 것처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는 세상의 풍조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바울의 명령처럼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거기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우리를 절대로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가 자기의 영향력 아래 사는 이때 최대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하게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적인 복과 은혜를 하나도 맛보지 못하게 하고 계속해서 터진 웅덩이를 찾아 방황하도록 만듭니다.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로 충분한가?” “내가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든 그리스도를 얻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속이는 거짓 가르침인가?” 여러분의 말과 생각을 주의하십시오. “물론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을 멈추십시오.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오직 그리스도로 충분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한 자 마귀가 나를 사로잡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공급을 충분히 받아 건강하게 자라나는 몸 된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