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은 목자의 마음을 아십니까?

본문 : 골로새서 2장 1-7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은 조금 특별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목사가 성도를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속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드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1절을 보시면 바울은 “너희”라고 언급한 골로새 성도들, 또 골로새에서 북서쪽으로 18km 떨어져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 그리고 그외 자기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히에라볼리”, 4:13) 위해 얼마나 힘쓰는지를 그들이 알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지역은 에바브라를 통해 복음이 선포된 지역이고, 그들은 에바브라를 통해 돌봄을 받던 성도들이었습니다(골 1:7-8; 4:12-13). 

바울은 자기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성도들에게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편지하면서, 그들이 어쩌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를 편지를 통해 다루고 있습니다(4:16,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 그러면서 그들을 향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선하고 진실한지, 진짜 사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치열한 경주를 하거나 전쟁에서 생사를 걸고 싸움을 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힘쓰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 그 지역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실로 목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는 육신의 자녀를 키운 아버지이자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였습니다. 어느 날 백성이 불평하며 울부짖자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이들을 낳았습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민 11:12). 

목회는 자녀 양육과 같습니다. 영의 양식을 끼니때마다 제공해야 하고, 성도끼리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살도록 가르쳐야 하고,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잘못 나갈 때 다그치고 바로잡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곧게 자라도록 끝까지 책임지고 돌봐야 합니다.

정직한 부모는 스스로 평가하기를 ‘자녀 양육에 최선을 다했지만, 항상 부족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실하다는 걸 자녀들이 알아주길 기대할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힘쓰는지” 스스로 알지만, 항상 부족하고 성도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를 향한 진심, 그 선한 동기만큼은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말할 5가지 목자의 진심은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밝힌 사도의 마음이자, 제가 여러분에게 품고 있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자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알아주기를, 목자가 바라는 그것을 함께 갈망하길 원합니다.

1. 목자는 성도가 위로받기 원한다(1-2)

2절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첫째로, 목자는 성도가 위로받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면서 “이는”(목적)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이 행하는 모든 노력과 봉사와 수고의 목적이 성도를 위로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위안을 받다’(파라칼레오)라는 이 표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에 나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8). 신적수동형 표현이 이 위로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간절히 바란 위로는 사도의 말이나 지혜, 힘에서 나오는 위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 그 위로를 성도의 마음에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위로의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참고. 살후 2:16-17)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가 받는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칩니다(고후 1: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직접 성도를 능히 위로하십니다. 바로 이런 종류의 위로가 목자가 간절히 성도에게 임하기 원하는 위로입니다.

언젠가 제가 한 성도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라고 답장 온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혼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목자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가 위로를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죄를 다루는 이유는 그 죄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가 위로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성도와 함께 울고 웃으면서 간절히 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성도에게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참된 위로가 되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참된 위로이십니다!

결국 목자가 행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빌 2:1). 저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참된 위로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2. 목자는 성도가 하나되기 원한다(2)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두 번째로 목자의 마음은 성도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2절에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골로새 성도를 위해 힘쓰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따르는 편을 만들어 그렇지 않은 성도를 차별하거나 공격하는 목자는 참 목자가 아닙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교사나 일꾼을 성경에서는 ‘거짓 선생’, ‘속이는 자’라고 부릅니다. 유다서에서는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이으키는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라고 무섭게 책망했습니다(유 1:19).

참된 목자는 성도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냐하면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신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구하셨습니다(요 17:11).

그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는 부르신 자들이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그리스도의 양을 돌보면서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도를 하나 되게 하는 일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엡 4:3). 성도들은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랑”, 다른 말로는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납이 필요한데(엡 4:2),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연합에 실패한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빌 2:5).

어렸을 때 동생과 다투면 어머니께서 ‘엄마 친구 아들딸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비둘기처럼 사이좋게 지낸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라면서 도대체 그 비둘기 남매가 누군지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들이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목자는 성도가 사랑으로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이 사랑으로 연합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가 그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목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합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3. 목자는 성도가 깨우치기 원한다(2-3)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절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세 번째로 목자는 성도가 깨우치기 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도가 그리스도를 깊이 알기 원합니다.

2절과 3절에서 바울이 길게 강조한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개요로 삼은 성도의 위로와 연합은 매우 짧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2절 상반절). 하지만 세 번째 개요인 “그리스도를 깨닫기 원한다”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성도의 참된 위로이시고 성도를 연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4절).

지혜와 지식을 억지로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지식은 훌륭한 판단력, 지혜는 그 훌륭한 판단력을 행동으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랜트 오스본, 267). 예를 들어 기상에 대한 정보를 잘 판단하는 능력은 지식을, 그 정보를 실생활에 적절히 활용하여 농사짓는 것은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숨겨져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저장되어 있다’, ‘쌓여 있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께 있으니 다른 곳을 기웃거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5:39),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온전하게 만들어주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자꾸 다른 곳을 기웃거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만한 가치가 없는 분인 것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쉽게 싫증 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우리의 이해가 너무 얕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점점 더 자라나고 그 안에서 확신을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벧후 3:18).

미국의 남침례교단 총장인 앨버트 몰러 교수는 신학 토론회에서 같이 나온 교수들과 열심히 신학 토론을 하다가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질문하러 나온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신학 토론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저에겐 예수 그리스도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교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호칭인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아라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럼 메시아는 어떤 일을 하는 분입니까?” 이런 식으로 묻기를 몇 차례 하다보니 그 시간이 신학 토론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말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처럼 영원하지 않은 지식과 지혜를 배설물로 여기고 영원한 하나님의 비밀,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이신 예수님을 더욱 얻으시기 바랍니다(빌 3:8).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상고하고,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어떻게든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풍성하게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기도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천국에 영원히 사는 것이 왜 지겹지 않은지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에 영원한 만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을 영원히 만족시킬 만큼 풍성하고 아름답고 충만한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이 땅에서부터 더욱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목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4. 목자는 성도가 속지않기 원한다(4)

4절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네 번째로 목자는 성도가 속지 않기 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오직 그리스도로 위로받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합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풍성히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힘썼는데, 그것은 그들이 교묘한 말에 속지 않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골로새 성도를 속이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누가 됐든지 바울은 “아무도”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기 원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로 무장하여 누구도 “교묘한 말”로 그들을 속일 수 없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 지역은 에바브라가 사역한 곳이었는데,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그 지역을 위협하는 거짓 선생의 가르침에 관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가 다음 주부터 다룰 2장 8절에서 23절까지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앓고 있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며 그들이 거짓에 속지 않기를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부터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교묘한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리는 논증’, ‘잘 꾸민 논증’, ‘그럴듯한 논증’을 말합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은 종종 더 화려하고 달콤하고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속기 딱 알맞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다른 풀을 먹고 배탈 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원합니다(벧전 2:2). 목자는 양들이 가는 길을 이탈하여 길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벧전 5:8).

교묘한 말에 속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문 말씀 앞뒤를 샌드위치처럼 싸고 있는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2-3절에 있는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풍성히 이해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나올 말씀인 5-7절에 나오는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5. 목자는 성도가 굳게서기 원한다(5-7)

5절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인 로마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에바브라를 통해 그들의 믿음이 굳건하다는 것과 질서 있게 행한다는 것을 듣고 그것을 마치 육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특별히 ‘질서 있게 행하다’와 ‘굳건하다’는 표현은 군대용어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영적 전쟁터인 세상에서 골로새 교회가 군열이 잘 정돈 되고 가공할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 둘러본 사령관처럼 사도로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의 믿음과 삶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그들에게 마지막 다섯 번째 권면을 합니다.

6절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절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핵심이 되는 권면은 바로 6절에 나오는 ‘그 안에서 행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식물과 건물 그리고 법정 용어입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식물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렸으면 그리스도에게서 자양분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건물의 비유입니다.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듯,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터가 되셨으니 그 위에 함께 지어져 가라는 것입니다(엡 2:21-22). 마지막으로 ‘굳게 서다’라는 표현은 법정 용어로 보증, 확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보증이 되시니 더욱 그 확신 가운데 흔들리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바울이 결국 하고자 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너희 믿음의 토양이 되시고, 너희가 세워지는 터가 되시며, 너희 믿음의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특별히 여기서 “행하라”는 표현은 유대인식 표현으로 ‘걸어가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교회에게 명하신 말씀에 따라 말하자면, ‘나를 따르라’는 말입니다(마 16:24).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 원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 걷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구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그들을 채워달라고 간구했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골 1:9-10).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우리가 주로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며,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3장과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을 다룰 때 더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 골로새 성도를 향한 진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본 적도 없는 성도를 위해 많은 수고를 감당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그들의 마음에 위안을 받게 하기 위해서, 둘째 그들이 사랑 안에 연합하기 위해서, 셋째, 그들이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하기 위해서, 넷째, 그들이 거짓 교훈에 속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목자는 성도가 위로받기 원합니다. 목자는 성도가 하나 되기 원합니다. 목자는 성도가 깨우치기 원하고, 속지 않기 원하며, 목자는 성도가 굳게 서기 원합니다. 이 다섯 가지 항목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붙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성도를 위로하고, 그리스도가 성도를 하나 되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때 믿음이 굳게 서며 그럴 때 교묘한 말에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회가 얼마나 힘든지 우는 소리로 설교를 마칠 수는 없지만, 히브리서 말씀처럼 성도를 인도하는 일은 그들의 영혼을 경성하기를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는 힘들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일입니다. 수백 명의 영혼의 가치만큼 막대한 짐이 목자에게 지워져 있습니다(히 13:17).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내내, 잠자려고 누워 있을 때도 이 무거운 책임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목자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목자가 언제 즐거운지 아십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쓴 편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살전 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