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나를 살피는 세 가지 질문
본문 : 누가복음 6장 39~49절
설교자 : 이병권
새해를 맞이하고, 첫 번째 누가복음 시간입니다. 작년까지 우리는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이 하신 평지 설교를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평지 설교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배우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설교가 쉽지 않으시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고 있는데, 그렇게 순종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가는 길이 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길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길이 참으로 복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입니다. 단순히 명령을 지키고 따라야 하는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 위해 살고자 하는 새 힘을 줍니다.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나를 살피는 세 가지 질문”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질문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여러분은 현재 누구를 따르고 계십니까? 너무 당연한 질문인가요? 답이 금방 나오십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 질문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거 같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엉뚱한 것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으로 갈 때도 많고, 다른 사람을 따를 때도 많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39절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지금 따르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분별하고 주의할 것을 경고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누군가를 따라 갑니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앞서 가는 사람, 자신을 인도하는 사람을 따라 갈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가는 사람도 앞을 못 본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미래는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눈먼 사람이 인도자가 된다면,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구덩이”는 발이 살짝 빠지는 정도의 얕은 곳이 아닙니다. 크고 깊은 구덩이를 말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공사 중에 있는 맨홀 구멍에 쑥 빠지는 겁니다. “이런! 좀 기분 나쁜 일이 생겨버렸네! 이 일을 어떡하지” 이런 정도의 일이 아니라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가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여기에 가면 좋다, 이건 꼭 필요한 거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인도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헷갈리게 하고, 정신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영적으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친절하게 우리를 구덩이로 안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려는 자들을 조심히 살펴보고, 지속적으로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의 중요함을 설명하시기 위해 격언과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40절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0절의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선생에 그 제자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제자는 자기 선생을 닮습니다. 이 당시에 선생과 제자와의 관계는 아주 인격적인 관계였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는 선생과 거의 같이 살았습니다. 같이 살면서 책이 아니라, 당시에는 책이 별로 없었고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이 직접 전하는 말과 행동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자가 선생에게서 모든 것을 배우고 나면, 그 제자는 선생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따르고 있는 자를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제자는 선생을 닮게 될 것이고, 그 선생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올바른 선생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선생을 따름으로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선생으로 따르고 계십니까?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건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야 합니다. 삶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있는 분들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영적인 인도자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늘 잊지 마시고, 나는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살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말씀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따르고 있는 자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너희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주의하여 살피도록 하여라.’
이어서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이 이번에는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나무에 따라 그 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 분명한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일깨워주시며,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십니다. 43절부터 보겠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3-45)
예수님은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열매를 통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 열매가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겉을 꾸미고 그럴 듯하게 위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매는 감출 수 없습니다. 결국은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학생들이 그림자극을 준비했었습니다. 커튼 뒤에서 움직이면 원래 모습이 왜곡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합니다. 진짜 모습이 아니라 꾸며진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불이 켜지고 커튼을 걷고 나면, 커튼 뒤에 숨어있었던 진짜 모습이 나타납니다. 잠시 동안 그림자 연극을 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그 실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의 진짜 모습은 내가 삶에서 맺는 열매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여기서 입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입은 우리가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합니다. 여러분은 만약, 매일 내가 하는 말을 평가한다면, 스스로에게 어떤 평가를 하시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말에 잦은 불평과 습관적인 비난과 분노가 가득하다면 그것이 나의 마음에 있는 실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 단순히 겉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위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에 대해서 생각할 때 특별히 조심할 부분이 있습니다.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지속적으로 볼 수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몇몇 상황을 통해서, 누군가를 나쁜 열매 맺는 사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여전히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잠깐 동안 보여 지는 열매를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거듭난 사람이라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선한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정말로 거듭났는가? 정말로 생명이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 생명력을 감출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로 죽은 사람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말씀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너희는 너희 입에서 어떤 것이 나오는지 살펴보아라. 그것이 너희 마음에 무엇이 가득한지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집을 짓고 있는가?” 예수님의 설교는 들은 말씀을 실천하라는 확실한 경고로 마무리됩니다. “너희가 나의 하는 말을 잘 들었느냐? 그럼 그 들은 것을 행하여라.”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인상적인 비유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비유에서 집을 짓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집을 짓기 위해, 먼저 땅을 깊이 팝니다. 그리고 큰 바위 위에 집의 기초를 놓고, 집을 짓습니다. 그 후에는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큰물이 밀려와서 집에 부딪힙니다. 이 물살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그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라 안전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 사람은 집을 짓는데,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러고 나서 물이 들이치자, 흙 위에 지은 집은 곧바로 무너집니다. “곧” 그 즉시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무너진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파괴됨이 심하다는 표현을 덧붙이십니다. 흙 위에 지은 집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삶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없을 때는 기초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별 일없이 순탄할 때는 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게 되면 그 때 우리는 진짜 인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행함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안전과 견고함은 삶에서 말씀을 어떻게 행하는 지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버티기에는 우리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행하지 않고는 우리의 인생을 견고하게 지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어떤 집을 짓느냐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화려한지, 얼마나 큰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입니다. 집을 어디 위에 짓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우리가 어떤 집을 짓든, 어디에 짓든, 관계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큰 물을 만납니다. 풍파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인생에서 다양한 어려움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인생의 어려움과 시련을 이기게 하는 든든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어디에 집을 짓고 있는지, 다시 말해, 나는 들은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순종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어려움과 풍파 속에서 우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줄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만나는 어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순종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잘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 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지혜라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부르면서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문이라 부르면서 두드리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부르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아라.
이 시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곧 주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행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들은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 말씀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나의 하는 말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아라. 듣고 행하는 것은 인생의 풍파를 만날 때에 흔들리지 않도록 너희를 붙들어 줄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세 질문에는 반드시 먼저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이게 먼저 적용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뭘까요? 42절입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적용할 원리는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십시오. 오늘 함께 살펴본 세 가지 질문은, 나를 살피는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나부터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나를 보기 전에 남을 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너무 사랑이 많아서, 너무 이타적이어서,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챙기려고 합니다. 나를 살피기보다 다른 사람을 살피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나를 점검하는 일은 뒤로 미뤄두고,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고쳐주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상대방을 더 훌륭하게 만들려고 뜨거운 열정으로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실수나 단점을 얼마나 잘 보는지요! 우리는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매의 눈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기가 막히게 찾아냅니다. 그 타고난 능력을 활용함으로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들을 발견하고, 안 봐도 될 것들을 보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말하고, 주야로 부지런히 그것을 묵상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죄악 된 본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내 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에,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를 살핀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그러니 오늘 질문을 통해서 먼저는 나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주위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살핀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 집을 짓고 있는가? 그리고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 들을 때, 특별히 지금처럼 예수님의 설교를 살펴보면서 직접적인 명령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뭔가 나의 부족한 점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고, 내가 순종하기에 부담스러운 일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낙심되기도 합니다. 자꾸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결국 내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동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보다 그냥 해야 한다는 명령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외식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닌데 괜찮은 척하는 겁니다. 다들 그런 거 같으니까, 나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것들이 저만 경험하는 일인가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은 의무이지만, 동시에 특권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주신 명령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대통령이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바뀔까요? 해야 될 것들이 많이 생기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신분이 되었을 때 해야 할 일들은 의무를 넘어서는 책임이고, 즐거움으로 감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눈 먼 자들을 좇아 가다가 영원한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자였는데, 영혼의 참 목자 되시는 분을 만나서 그분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분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생명을 가진 자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허락하셔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 은혜를 기억함으로 삶에서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을 순종으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세 가지 질문으로,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따르고 계십니까?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집을 짓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