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좋으신 나의 하나님
본문 : 시편 23편
설교자 : 최종혁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성경에 수많은 말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무엇일까요? 아마 가장 알려진 것은 요한복음 3:16일 것입니다. 간혹 스포츠 경기를 보다보면 관중들 중에 이 구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구절은 무엇일까요? 창 1:1일 것입니다. 가장 짧고 성경의 가장 앞부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의 집에 걸려 있는 성경 말씀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일 것입니다. 사업장이나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라는 구절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통틀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며 가게마다 가장 많이 걸려 있는,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는 구절이 있다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이 시편은 전체를 암송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편을 가지고 만들어진 찬양들도 많아서 그 찬양들만 골라서 하루종일 들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편 23편이 왜 이렇게 유명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편이 되었을까요? 어떤 특별한 점이 있어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짧고 간결한 이 말씀이 담고 있는 분명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때문일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 좋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1)과 그렇게 말하는 이유(2-5), 그 모든 것에 대한 결론과 다짐(6)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이 구절은 시편의 가장 큰 주제이고 다윗의 진심이 담긴 선언입니다. 이 시편의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지극히 개인적인 시편이라는 점입니다. 이 시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나”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인 친밀감의 표현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없으리로다”는 말은 ‘없을 것이다’라는 불확실한 의미나, ‘없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선포의 말입니다. 다윗은 목자로 자란 사람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당시에 그리 대접받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낮아지셨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양은 목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양은 하나님 없는 인생을 보여주시려고 창조한 피조물인 것 같습니다. 양은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정도로 무능합니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양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동물의 왕국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들소나 초식동물들이 적당한 목초지를 찾아서 본능적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보는데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은 목표를 향해 가지 않고 방황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또한 겁이 많아서 잘 누워서 쉬지도 않습니다. 양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덩치가 크거나 뿔이 있거나 보호색이 있지도 않습니다. 천적이 나타나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도망가는 것 뿐인데 그러기에 달리기도 빠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생존을 위해 목자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불쌍하고 위험한 상태를 말합니다. 양은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 목자나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양을 이용하는 목자를 주님은 “삯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그들을 이끌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목자입니다. 양의 생존은 전적으로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은 목자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양의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좋은 목자, 참 목자를 만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목자가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는 어떤 존재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이 아니더라도 신의 위치에 올려놓은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삶에 진정한 목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고 자신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네 가지로 제시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2). 하나님이 그의 목자가 되시는 이유는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하시는 일 중에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푸른 풀밭”이란 표현에서 먹을 것이, “쉴 만한 물가”라는 표현에서 마실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푸른 풀밭에 누이시는 것’과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쉼을 주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양과 관련된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대부분의 사진은 양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양이 누워있는 모습의 사진은 거의 없습니다. 양은 기본적으로 잘 눕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겁이 많아서입니다. 자신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보지 않으면 눕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파리나 벌레가 괴롭힐 때 눕지 않고, 다른 양과 싸움이 있으면 눕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이 양을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고 표현합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요소가 다 충족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쉴만한 물가”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하나는 ‘양이 쉴 만한 물가’, 즉 적당한 물가입니다. 또 하나는 ‘물이 천천히 흘러가는 물가’입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다 의미하고 썼을 수도 있습니다. 양은 잔잔한 물가에서만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빠르게 흘러가면 양이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돌을 이용해 물을 잔잔하게 만들어 양에게 물을 먹입니다. 바로 그런 곳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지 않으시면 양은 아무 물이나 먹습니다. 고여 있는 물, 썩은 물을 먹기도 합니다. 양이 이런 안식을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좋은 목자가 없다면 그런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삶을 통해 그러한 안식을 누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이런 안식을 찾아다닙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쉴 수 있을까, 쉼을 누릴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기에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이것이 사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에게 안식을 줄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눈앞에서는 그 만족을 줄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목자를 찾을 때까지 참된 안식은 없습니다. 시편에는 “주께 피하는 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그러한 자들이 바로 참된 안식을 찾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주는 좋은 목자이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3). ‘소생시킨다’는 것은 ‘원래 있는 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양은 방황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시력이 나빠서 멀리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이기적인 기질도 한 몫을 합니다. 바로 눈앞에 것들만 따라가기에 원래 있던 곳에서 이탈하기 쉽습니다. 무리에서 이탈하여 다른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양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경우입니다. 새끼를 베거나 털이 많이 자라거나 살이 쪄서 몸이 뒤집어지면 양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스운 장면일지 모르지만 양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위험한 순간입니다. 빨리 되돌리지 못하면 배에 가스가 차서 죽거나 다른 동물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러한 양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목자가 하는 일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연스레 죽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하고 우리를 양에 비유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참 적절합니다. 우리를 보면 양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원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그러한 습관이 있어서 늘 달아나려고 합니다. 그런 우리를 원래 자리로 되돌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3). “의의 길”은 바른 길입니다.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말은 이기적인 목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걸고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양을 인도하는 좋은 목자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4). 3절까지는 평안하고 안정된 상황을 묘사했다면, 4절에서 다윗은 우리가 항상 그런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맹수들이 숨어서 양을 노리기 쉬운 곳입니다. 죽음의 위험이 큰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곳도 사실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 가운데 있어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께서”라는 번역은 우리말식의 표현입니다. 사실은 ‘당신께서’라는 번역이 정확합니다. 이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정말 가까이 계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목자는 늘 양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고 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 그는 잔잔한 물가의 푸른 풀밭과 같은 상황에 있었고, 때로는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서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낄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확신 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목자는 두 종류의 막대기를 들고 다닙니다. 곤봉 같은 짧은 막대기로는 다른 짐승들을 쳐서 양을 보호합니다. 끝이 굽은 긴 막대기는 길을 갈 때 덤불을 헤치거나 구덩이에 빠진 양을 들어 올릴 때 사용합니다. 이러한 막대기와 지팡이로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는 양은 평안함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보호하고 인도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것과 평안한 환경에 거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삶의 폭풍우를 만날 때 그것을 잠잠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벗어나게 해달라, 건져내달라,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폭풍우 속에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5). 이제는 목자의 이미지가 아닌 손님을 맞이하는 집주인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집주인은 자신이 피해를 입더라도 자기 집에 온 손님은 보호하고 접대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나쁜 일로 도망하는 자라고 해도 일단 자기 집이 손님이면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주인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돔에 살던 롯에게 천사가 찾아오고 이를 본 마을의 사람들이 와서 그들을 내놓으라고 할 때, 롯은 자신의 딸들을 줄 테니 건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은데 당시에는 손님 대접의 가치를 그와 같이 여긴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집주인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그리고 있습니다.

집주인은 손님에게 상을 차려주고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오랜 여행에 지친 사람에게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마실 것을 주는데 잔을 넘치도록 줍니다. 이것이 집주인이 손님에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원수들의 목전”에서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관대하고 친절한 집주인처럼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6). 이것이 결론적인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계속해서 따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적극적인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도망가는 적군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가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추격해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벗어나려고 해도 계속 나를 따라오셔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가졌던 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할 확신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런 확신이 들만한 상황이 아닐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계신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양처럼 목자가 있는가 없는가 의심하고 때론 섭섭해하고 불평 불만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확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고 진정한 안식을 주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다윗이 내리는 결론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핵심은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다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해하기 참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잘 되어 갈 때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고백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을 때나 원수가 도사리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고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선하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지 않은 상황은 왠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중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 시편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해당되지 않는 것 같을까요. 새로운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험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 때 이 시편을 기억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을 때 이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과거에 좋으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좋은 하나님이시고, 앞으로도 좋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하루 하루가 되어, 우리의 일 년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양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