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기쁨의 이유
본문: 야고보서 1장 9절~12절
설교: 조 정 의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서는 최초의 신약성경이자 최초의 서신서로서, 주후 45-49년 사이에 쓰인 책입니다. 주후 45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아 전도여행을 떠납니다(행13장). 그리고 주후 49년에는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려,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행15장). 야고보서는 바로 사도행전 13장과 15장 사이에 기록된 최초의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행12장), 그 이전의 스데반의 죽음과 교회의 많은 핍박, 환란으로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약1:1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제 막 환란이 닥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야고보가 전한 최초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단순한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확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거짓된 그리스도인인지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교회가 오래되어 사랑이 식어지고 거짓성도들이 일어났을 때 쓰인 편지가 아니라, 이제 막 환란을 당하기 시작한 초창기에 보낸 편지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공부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믿음을 확증하게 함에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다양한 확증의 도구들이 제시될 때,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졌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실함과 불확실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공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약1:2-8에서는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말씀합니다. 각처에 흩어져 환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3)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내들이 스스로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인지 확증하는 도구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하고, 믿는 자답게 시험 중에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차별도 조건도 면박도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시험을 이겨내는 지혜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제 9-12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성도들의 당하는 고난과 시험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대조되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낮은 형제”와 “부한 자”입니다. 여기서 “낮은 형제”는 “부한 자”와 대조되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형제라고 할 수 있고, 또한 “형제”라고 부른 것으로 그가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성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성도와 부한 성도에게 동일한 명령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자랑하라”입니다. 이 말은 1:2에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 것보다 더 강한 표현입니다. 기쁘게 여길 뿐만 아니라 크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순교와 핍박, 극심한 환란으로 각처에 흩어진 그들에게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낮은 형제”(가난한 형제)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에 닥친 여러 핍박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간 상황에서 자신의 땅문서나 재산을 챙겨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물들을 두고 가야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유대인들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유대인의 모임에서 축출 당했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이주한 곳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하려면 천하고 힘든 일들부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소작농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오늘날보다 훨씬 불합리한 시대였으므로 정당한 품삯을 받지 못하고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야고보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고후 6:8-10에는 사도 바울이 가난한 상태에서 자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자랑할 수 있었을까요? 가난이나 궁핍과 같은 어떤 환경도 건드릴 수 없는 것, 바로 영원한 생명, 구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엡1:3-14에는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구원의 복음, 하늘의 기업을 이을 자가 된 것을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극심한 가난은 우리에게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하고, 때로는 염려하고 근심하게 합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어떤 성도가 좋은 차를 타고 오면 시기와 질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특권에 대해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부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샀던 요셉, 백부장 고넬료, 랍비였던 니고데모 등 믿는 자들 중에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야고보는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부자의 낮아짐은 무엇입니까? 부유한 환경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재물을 의지할 수 있었고, 하나님 대신 재물을 섬기고 그 안에서 누리는 안정감과 쾌락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눅12장에 나오는 부자는 소출이 풍성해서 창고를 짓고 이제부터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부한 자들에게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이 없을 지라도 남아있는 참된 것, 영생과 구원을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10)가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부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 이스라엘의 꽃은 2월에 피었다가 5월이 되면 뜨거운 바람이 불어 꽃이 말라 시들어버린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웠던 꽃도 금세 지고 맙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환경들은 그것이 부하고 안락하더라도 곧 안개와 같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시적인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영원한 것, 곧 우리의 구원을 자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 부를 자랑하면 덧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고 실제로 가졌던 솔로몬도 자신의 모든 행위들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다 평생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재물, 물질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랑한다면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랑할 바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할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려움 중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고 원망을 할 수도 있으며 때론 재물을 의지하고 쾌락을 추구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지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함으로 주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생명, 우리의 구원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12). 여기서 “참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한두 번 시험을 참아 본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참아내는 사람이고 지금도 그 시험을 참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복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시련을 견디어 낸 자”(12)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견디다”라는 말은 과거형입니다. 즉, 시험을 통과했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으며 다윗과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완벽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모세는 불순종했으며, 다윗은 간음을 했던 사람,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믿음이 통과된 자, 시험을 견디어 냈다고 입증된 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험을 참고 있는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닥치는 여러 물질적인 어려움 앞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거나 또는 쾌락과 물질에 빠져 있다면,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여러분은 시험을 견디어 낸 자로 입증되지 못할 것입니다. 입으로 자신이 믿는 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은 귀신들도 그렇게 말하고 떤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그런 행위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시험을 참고 있는 자인지, 구원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자인지, 진실로 구원받은 자인지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진정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시험을 참는 자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라는 것을 입증할 것이고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이 야고보서 공부는 진지하고 신중한 공부가 될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삶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함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의문에 싸이게 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시험을 참고 견디며 구원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분이라면 그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