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 – 성경적인 자존감

본문 : 시편 8편

설교자 : 최종혁

시 8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철학적인 질문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인간은 무엇일까’입니다. 이것에 대해 세상은 대체로 두 가지 답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자연주의 사상에 입각한 생각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세계를 부인합니다. 하나님도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그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핵심이 되는 이론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인간과 세상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진화론에서는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의 조상에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설명하든 결국은 인간이나 원숭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진화론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인간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최근에는 ‘자존감’, ‘자기애’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답합니다. 이것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울을 보며 자기 최면을 하는 듯합니다.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이 참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근거가 되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배제한다면 왜 우리가 우리를 존중해야 하는지, 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허무주의’입니다. 물질이 전부이고 죽으면 인생이 끝이라면 ‘될 대로 되라’는 허무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지, 왜 인간이 존귀한 존재인지에 대해 성경은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인간은 과연 존귀한 자일까요? 창조주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시편 8편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로서 그 기록 시기와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이 시의 상황이 온 땅과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시간적으로 창조 시대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8편은 이렇듯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의 1절과 9절은 동일한 구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과(1-4절),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5-9절). 시를 써내려가는 다윗의 생각과 시선은, 하나님에서(1,2절) 피조물로 이어지고(3절), 다시 인간으로(4,5절) 이어졌다가 다시 피조물로(6-8절), 그리고 다시 하나님으로 옮겨갑니다(9절).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 우리 주여”(1). 다윗은 이 찬송시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출 3:14에서 모세와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인데, 그 원형이 되는 것은 ‘나는~이다’입니다. 이것을 명사형으로 만든 것이 “여호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되었고 영어 성경에는 “I am”이라고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언제나 계시고 어디서나 계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다른 어떤 시대 어떤 민족도 자신들의 신을 부를 때 이런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자신의 신을 여호와라고 부른 것입니다. 참된 신이신 하나님께만 사용했던 칭호입니다.

요 8:58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사용한 표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알아듣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며 돌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사용했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우리 주여”(1)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조주로서의 주권을 강조한 표현(“주여”)이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우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찬양하기에 앞서 찬양의 대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시공에 제한이 없으시고 언제나 계시는 하나님,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1).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호칭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온 땅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른 번역에서는 “위엄이 넘친다” “크다” “장엄하다” “뛰어나다”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름답다”는 표현은 단순히 예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렵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온 땅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과 위대하심, 놀라우심을 온 땅에 가득히 펼쳐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피조물들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일 뿐입니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개역성경에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표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을 가득 덮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어떤 만들어진 것을 보면 그것을 만든 존재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든 것’이 곧 ‘만든 자’는 아닙니다. 그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 땅의 만물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 “대적”과 “원수”, “보복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권능을 세우시고 그들을 잠잠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그렇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스스로 살아갈 힘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아주 작은 벌레들도 살기 위해 날아가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합니다. 짐승의 새끼들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처럼 무력한 존재는 없습니다. 부모가 돌 봐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 도와달라고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없다 하는 강한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5-16).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법입니다. 작고 어리석은 것들로, 크고 강한 자들을 무너뜨리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도구도 하나님의 손에서는 능력을 드러내는 강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3). 다윗은 하늘의 달과 별들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의 목동시절을 회상하는 듯합니다. 다윗은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윗보다 더 많은 별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별들을 볼 수 있고 새로운 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인간이 달에도 가고 우주에 탐사선도 보내지만 그 모든 연구를 통해서 인간이 내리는 결론은 ‘우주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광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주를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자연이 위대한 것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욱 놀랍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을 통해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별들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 시의 시선은 다시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달과 별은 나에 비해 너무 큰 존재이고 그에 비해 나는 너무 하찮게 느껴집니다. 큰 산과 넓은 바다에 가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나 자신은 참 약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욥 7:17). 놀라운 것은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별들의 숫자를 세시고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는 하나님이 우리 같은 작은 존재에게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여기서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은 과거 개역성경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였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인데 “여호와”와는 달리 하나님이 아닌 존재, 천사나, 거짓신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초월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초월적이고 영적인 존재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다는 표현인데, 그것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짐승보다 조금 낫게 하시고’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는 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존재로 세우신 것입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영화와 존귀”는 앞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비슷한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에 있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그저 진화의 산물이라면 그는 귀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자존감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자존감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내가 그의 피조물인 것을 아는 것,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인간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 안에서 참된 자존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6). 만물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택하셨고 그들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7,8). 이와 같은 것들을 인간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 이 피조물들은 우리의 발 아래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잘 길들여야 겨우 말을 듣지 웬만해선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 아담 때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지구의 왕으로 존재하여 만물이 그의 명령을 따랐으나, 지금은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인간이 왕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오히려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가 존귀하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높아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뒤틀어진 삶을 돌이키시기 위해(아니 인간을 그보다 더 높이시기 위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사보다 못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되신 것은, 친히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다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고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와 함께 다시 왕노릇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주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피조물로 다시 이 땅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낼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하고 죄악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는 존귀할까요, 비천할까요?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이하로 생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찾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피조물에 대한 말을 많이 했지만 중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1절)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갑니다(9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을 생각할 때 이보다 좋은 마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