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그리스도의 고난
본문: 시편 22편 Part 2
설교자: 최종혁
역사상 인류에게 있어 가장 춥고 가장 어두웠던 순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편 22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앞 부분은 기도로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과 관계있는 부분이고, 뒷 부분은 찬양으로서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이 이 시편의 말씀을 메시아를 통해 성취된 말씀으로 이해했고, 예수님께서도 이 시편을 직접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저자 다윗이 아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기 원합니다. 이 예언이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그분의 육체적인 고통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에서 오는 고난, 사람들의 조롱, 육체의 괴로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본문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지금 화자는 ‘능력의 하나님이 왜 나에게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표현은 뭔가 어감이 좀 강하게 들리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느끼셨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돕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능력의 하나님이 나의 신음하는 소리도 듣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원망 섞인 말을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 우리는 좀 의아하기도 합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시간이 마가복음을 보면 제 3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시간으로는 오전 9시입니다. 3시간이 지났을 때 정오가 되어 제 6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 시간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말합니다. 그 어둠이 3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날 때쯤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어둠이 있었던 3시간 동안에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이 차마 고통당하는 아들을 볼 수가 없어서 어둠이 임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둠이 임했다고 못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어둠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이 관련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10-1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욜 2:1-2).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셨던 순간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심판하는 심판주로서 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3시간 동안의 어둠이 있었을 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부르시던 호칭은 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표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동안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항상 나의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압니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이 순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동안에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셨고 천사들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온전히 홀로 달리셨습니다. 버림받은 자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역사의 시작부터 역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그 죄에 대한 심판을 그 때에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 순간에는 깨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 가운데 계셨던 분입니다. 이 땅에 계실 때도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 교제할 시간에 늘 갈급해 하셨습니다. 자주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산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그러한 친밀함과 교제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는 나를 더 이상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어떤가요. 인간과의 관계도 이렇듯 마음이 아프고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데, 하물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 외로움과 슬픔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습니다. 다른 고난은 다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은 예수님만이 경험하신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3-5). 이 부분에서는 “주”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것은 강조의 의미입니다. 강조를 넣어서 읽어 보면, “하지만 주는 거룩하십니다. 주는 이스라엘의 찬송 위에 좌정하십니다. 주를 우리 조상들이 믿고 의지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주께 그들이 부르짖어 구원을 얻었고 주를 그들이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신실하십니다. 십자가 상황은 하나님을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좌정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언약에 신실하신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인지하심과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셨던 또 다른 고통은 ‘사람들의 조롱’입니다. 그들의 조롱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는 공격이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 벌레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6),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사 14:11),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예수님은 그러한 벌레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죽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니, 죽어 마땅한 것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7-8).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입니다. 그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머리를 흔들며 조롱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보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로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보니 당신의 말은 거짓말이다’, ‘당신이 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물론 어느 쪽도 사실이 아닙니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시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생각으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신뢰, 믿음, 확신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을 통해서 약 천 년 뒤에 이뤄졌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9-44).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던 강도까지도 이렇게 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네가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네가 주장한 것이 거짓이구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느냐. 하나님이 너의 편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사기꾼이다. 너의 모든 기적은 귀신을 힘입은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의 결론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처한 상황은 그런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것으로 상황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하십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9-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지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신실하게 예수님을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했다고 해도 하나님이기를 그만 두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예수님을 도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떠났습니다. 철저히 혼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계셨던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조롱이라는 고난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입니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2-13). “바산”은 목초가 좋은 곳이라 그곳에서 많은 소들이 자랐다고 합니다. 이 소들은 야생에서 기르는 소인데 매우 강하고 장대하고 힘이 세었다고 합니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바산의 황소를 ‘소의 신에 붙들린 소’라고 하여 강한 힘을 상징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 예수님께 도움을 줄 자는 없고 대적들만 있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14). 더 이상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는 손, 발, 어깨의 뼈가 정상적으로 붙어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연구가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몸의 상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직으로 세워져 있기에 몸이 아래로 처지면 팔과 어깨에 힘이 실리고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숨을 쉬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리의 고통을 참으면 팔이 편해지지만 다시 다리의 고통을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반복되는 고통입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군사들이 망치로 다리를 꺾습니다. 죽음으로서 고통을 끝내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하기 전에, 쇼크사나 과다출혈, 또는 호흡정지로 죽습니다.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14). “마음”과 “속”은 ‘심장’과 ‘내장’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어떤 번역본에는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15). 질그릇의 깨진 조각은 밖에 버립니다. 그러면 건조한 날씨에 태양을 받아 질그릇은 완전히 말라 갈라집니다. 깨진 질그릇 조각처럼 더 이상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15). 이것은 극심한 갈증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셨습니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15). 이미 죽은 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 여기 십자가 처형에 대한 가장 분명한 묘사가 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 때, 밧줄로 묶는 경우도 있었고 못을 박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통이나 출혈도 덜하기에 밧줄로 묶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사실 고통이 연장된다는 면에서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못을 박는 경우는 몇 시간 내에 죽기 때문에 고통의 시간은 짧지만 고통의 강도는 더욱 큽니다. 예수님은 못에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유대인의 명절인 안식일에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두지 않으려고 못 박는 것을 선택했을 것입니다(요 19:31).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시편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17). 십자가에 달려 몸을 일으킬 수 없고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뼈뿐이었을 것입니다. 말라 있는 몸의 뼈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 장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옷이 벗겨진 채로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었고, 몸의 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목하여 봤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누구를 십자가에 달았는지 알았을까요. 자신들이 누구를 십자가에 못 박고 누구를 조롱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들의 구원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8). 마찬가지로 군병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행했습니다(요 19:24). 그들에겐 평범한 하루였을 것입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그들이 항상 하던 일,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내렸고 정리하여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고 인류 구원의 길을 여신 날이었습니다.
이 시편은 기도로서 마무리합니다. 19-21절 앞의 기도에 비해, 여기 마지막 기도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하나님께 이제 개입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절정은 21절이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19-21).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서 확신의 기도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확신 가운데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확신 가운데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셨을 때 스스로 육체를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사람들의 조롱, 그리고 육체적 고통을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메시아의 모습에 유대인들을 등을 돌렸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켜 본 한 백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하나님을 신뢰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도,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생을 통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여러분과 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이러한 고난을 당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거하게 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이 가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 가치가 얼마나 크다고 여기십니까? 이는 단순히 한 사람이 고난당한 것에 대해 애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안다면 그 가치가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 고난의 가치가 나의 자존심보다 큰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치 있다는 것이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드러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존심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가치에 무감각해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통해 그 가치를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감사와 찬송을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입술의 말이 예수님의 고난에 무감각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내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동료에게,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희생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고난의 가치를 안다면, 다른 무엇도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처럼 만들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