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들은, 그리고 우리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3
본문: 시편 106편
설교자: 최종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고 홍해를 앞에 두고 두려움으로 반응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실 것을 믿기 보다 두려워 떨면서 차라리 애굽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다고 원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광야의 길을 가며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의 죄를 범했다. 어떤 사람들은 질투의 죄로 백성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나타내시며 확신을 주셨고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심판으로 백성을 보호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그들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 호렙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소의 형상으로 바꿨다.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께서 멸하려고 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 사이에서 희생적인 중보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보자였다.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 은혜를 베푸심을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이제 시편 기자는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다.
고백(6-46절)
애굽에서(7-12절)
#1 두려움(7-12절)
광야에서 호렙까지(13-23절)
#2 욕심(13-15절)
#3 질투(16-18절)
#4 우상 숭배(19-23절)
호렙에서 가나안까지(24-33절)
#5 두려움2(24-27절)
앞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러했지만, 여기서부터 언급되는 사건들은 반복되는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시편 기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진노를 강조하면서 또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한다. 먼저 24-27절에 언급된 사건은 약속의 땅을 앞두고 있었던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인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앞두고 보였던 것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홍해를 앞두고 두려워 했던 것처럼 이들은 약속의 땅을 앞두고 두려워 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던 12명 중 10명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먼저 결론을 내렸다(민 13:31). 그리고 그들은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그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했다(민 13:32).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와 정확히 동일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울고 통곡하면서 차라리 애굽 땅이나 광야에서 죽는게 더 나았을 것이라면서, 다른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민 14:1-4). 정탐꾼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면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민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하지만 이에 대한 사람들은 반응은 놀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 했다(민 14:10). 그만큼
이 사건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요약해서 표현했다.
시 106:24–25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25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적절히 사용해서 당시 백성들의 죄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민 14: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극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표현했던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싫어했다. 기쁨의 땅이 될 수 있었던 그 땅을 멸시했고,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시편 저자의 표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들이 “그들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부분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악평하며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정당화 했을 것이다. 홍해가 그들 앞에 있고 바로의 군대가 그들을 쫓아왔을 때, 그들은 어떤 선택지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홍해가 앞을 막고 있기에 도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로의 군대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도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항복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 뿐이었다. 애굽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불평이나 원망을 한 것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 정당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문제를 두고도 이들은 같은 상황에 있다. 현실적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굳이 계란으로 바위를 칠 이유가 없었다. 바위가 계란에게 날아오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홍해에서야 애굽의 굳대가 쫓아오고 있었지만, 지금은 가나안의 거민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상황도 아니다. 굳이 잠자는 사자를 건드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왔던 길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아마 장막에서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문제가 될 이야기도 아니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들에게 그 땅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냉정한 현실 인식에 따른 정당한 문제 제기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기초한 또 다른 두려움의 죄였을 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두려워했고 불순종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같은 죄가 있을까?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결과는 바라지만 그 과정은 원하지 않아서 결과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것이 쉬워 보였다면 정탐꾼들은 그 땅에 대해 악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올라가서 싸우자고 백성들을 독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악평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했고 그들이 판단하기에 옳은 길을 선택했다.
결과의 행복은 원하지만 과정의 순종은 원하지 않는 죄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원인은 두려움이다. 가나안의 크고 견고한 성과 거주민을 이스라엘은 두려워했고 그로 인해 순종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의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우리도 현실을 두려워해서 같은 죄를 짓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은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것이다. 정직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다. 성적인 순결을 지키며 사는 것은 남들은 다 누리는 인생의 큰 기쁨을 포기하고 사는 것 같다. 성경적으로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결과적으로 자녀를 세상에서 실패자로 만들 것만 같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꼭 그렇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게 어떻게 행복한 삶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순한 순종이 우리에게 어렵고 두렵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는 시험이 되기도 하고 유혹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더 하나님을 기억하기 원하시고 신뢰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주시는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하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심을 우리가 보고 경험하게 하시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함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했는데, 그들은 그 임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이들의 죄로 인해 진노하셨고 그들을 심판하셨다.
시 106:26–27 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27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했던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은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했었는데(민 14:2), 하나님은 그들의 말대로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셨다. 죄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분명한 교훈이 되어야 했다. 에스겔 20:23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음을 말씀하셨다.
겔 20:23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에 헤치리라 하였나니
이 경고의 말씀은 그대로 예언이 되어, 이스라엘의 후손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결국 다시 이방인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시편 106편이 기록될 당시 상황이었다. 이미 오래전 하나님을 잊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을 자신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겠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심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지금의 교훈이 되어야 했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복에 대한 것이든 화에 대한 것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게 돌아가는 법이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
#6 우상 숭배2(28-31절)
다음에 기록된 사건은 또 다른 우상 숭배에 대한 기록이다.
시 106:28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여기 언급된 사건은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브올에서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고, 그 여자들을 따라 우상 숭배에 동참했던 사건이다. 앞선 호렙에서의 우상 숭배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호렙에서는 십계명의 제 2계명을 가장 직접적으로 범했다면 브올에서는 제 1계명을 가장 직접적으로 범했다. 호렙에서는 여호와의 형상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만들었다면 브올에서는 만들어진 아예 다른 신을 섬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다 매우 직접적인 우상 숭배의 죄였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호렙에서는 3천명 가량이 이 죄로 인해 죽임을 당했는데, 레위 자손들이 우상 숭배자들을 처형했었다. 브올에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백성 가운데 전염병을 보내셨다.
시 106:29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이로 인해 죽은 자가 2만 4천 명이었다고 성경은 말한다(민 25:9). 그런데 이 재앙이 그친 것은 마치 모세가 호렙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느하스가 중재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시 106:30–31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
바알 숭배와 음행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이 퍼져갈 때,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대놓고 음행을 행했던 사람이 있었다.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시므리였는데, 그는 미디안 가문의 한 수령의 딸인 고스비를 데려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장막에 들어가 행음했다. 그 의도를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시므리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서 그랬다기 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일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일을 행한 시므리에게 아무 일도 있지 않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론의 손자였던 비느하스는 창을 들고 시므리의 장막에 들어가 행음하던 두 남녀를 죽였고, 이 용감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나님은 칭찬하시며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셨다. 시편 기자는 이것이 비느하스가 죄를 지은 백성과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서 중재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 사건은 우리도 오늘날 행음하는 사람을 찾아서 즉시 처형해야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그런 일들은 법을 통해 되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법이 바르게 서고 집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죄를 눈 감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그렇게 진노하실 때에도 의로운 자를 일으키셔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는 이 역사의 교훈이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구체적인 역사의 기록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비슷한 교훈을 준다.
#7 욕심2(32-33절)
시 106:32–33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므리바 물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메추라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불평을 쏟아냈다. 그들이 계속 했던 말은 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불평과 원망은 다른 사건과 비슷하지만 므리바에서의 사건이 특별한 것은 모세가 죄를 범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모세가 했던 말과 행동을 보면 그는 백성들에게 분노를 표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을 “반역한 너희”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말했다(민 20:10). 그리고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민 20:11). 결국 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보여주셨던 하나님은 반대로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이라고 해도 죄의 결과에 있어서는 예외를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들의 불신의 죄를 하나님은 동일하게 심판하셨다.
지금까지 언급된 죄의 역사는 우리가 다 이런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과 그런 죄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또한 그 진노 중에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도 밝힌다. 이제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가나안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한다. 여기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증명되었는지를 전반적으로 기록했다.
가나안에서(34-46절)
#8 타협(34-46절)
마지막에 언급된 죄는 ‘타협의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이방 민족을 멸하지 않았고 그들과 혼합되어 살면서 결국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타협의 죄에 빠졌다.
시 106:34–39 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35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36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37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 38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39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더러워지니 그들의 행동이 음탕하도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죄에 대해서 경고하셨다(민 33:55). 민족 차별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우상 숭배의 문화가 문제였다. 결국 이방 민족을 멸하지 않고 함께 살면 그들이 “가시”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셨고, 결국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공존이나 상생은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들은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고 그들처럼 행동하는 민족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그 동안의 모든 그들의 역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출 19:4–6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나라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세우신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죄를 엄하게 다루셨다. 이전의 죄에 대해서 하셨던 것처럼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셨다.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다.
시 106:40–4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의 유업을 미워하사 41그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렸도다 42그들이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들의 수하에 복종하게 되었도다 43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런 진노 중에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다면, 긍휼은 정반대다. 죄에 대해 오래참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죄인에게 마땅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긍휼을 베푸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한 듯이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멈추지 않으셨던 것이다.
시 106:44–46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45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46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고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긍휼을 베푸셨다.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은 죄를 범했고, 이스라엘을 잊지 않은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셨다. 이것이 사사기에서 볼 수 있는 역사였다. 시편 기자는 현재 43절까지의 상황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죄를 범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긴 죄의 고백에 마땅한 반응 두가지를 시편 106편의 나머지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응
간구(4-5, 47절)
가장 먼저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간구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간구다. 이 간구가 죄에 대한 고백을 둘러싸고 있다.
시 106:3–5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5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시 106:4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이 역사이기에 시편 기자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구한다. 그것은 곧 지금 심판을 받아 흩어져있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
정의를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당연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죄를 범할 때가 그렇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될까? 헌금을 많이 하면 될까? 아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죄에 대한 첫 반응이 되어야 한다. 죄를 고백해야 하고, 또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하나님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긍휼이 없으신 하나님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친다.
때로 자녀들은 부모가 두려워 죄를 숨기기도 하고 죄를 고백할 때도 마치 재판장에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부모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다시 그 사랑으로 죄를 범한 자녀를 품어줄 수 있다.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은 더욱 그러시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자백에 있어 이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죄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거나 반대로 너무 크게 여겨서 하나님의 은혜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면 안된다. 나의 죄는 나를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만들고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만큼 크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만들만큼 크지는 않다. 처절하게 나의 죄를 인정하되 언제나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증명해 주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통해서 더할 수 없이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중요한 것은 내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 간구가 우리의 예배에는 항상 필요하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진정 높임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찬양
다음 반응은 찬양이다.
시 106:1–2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여기 2절의 말씀처럼 아무도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할 수 없고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할 수는 없다. 시편 4권의 시작인 90편에서 모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풀과 같이 이 땅을 살다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는 허무하게 의미 없이 목적없이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한 사람의 마땅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찬양에 우리는 아멘으로 반응해야 하며, 할렐루야를 크게 외쳐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도전
이 긴 시편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교훈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과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그냥 두지 않으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을 잊지 말자. 하나님을 기억하여 순종하고, 혹 죄를 범했을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고 모든 일을 이루시는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자. 그것이 우리의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