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들은, 그리고 우리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2
본문: 시편 106편
설교자: 최종혁
예배에 있어 우리 자신의 상태, 즉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회개가 중요함을 시편 106편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실패의 역사가 곧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의 실패이기도 함을 인정하며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언급한다. 그리고 결국 이런 죄에 대한 고백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고백(6-46절)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했지만, 106편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나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들어갔던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한다. 106편에서 다루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반역의 역사를 어떤 개인이나 남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와 우리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 역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애굽에서(7-12절)
#1 두려움(7-12절)
시편 기자는 먼저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를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사건을 언급한다. 이는 두려움의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이어지는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불신의 죄다. 이들은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인자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찬양했지만, 그 믿음은 피상적이어서 광야에서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 왔을 때 그들은 또 다른 불신의 죄를 범했다.
광야에서 호렙까지(13-23절)
#2 욕심(13-15절)
광야는 그야말로 시험의 땅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에 따라서 채우셨지만, 그들은 사람의 만족하지 못하는 죄성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정확히 그 필요를 공급하셨고, 사실 더 풍성히 주셨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4절에서 그들이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욕심의 죄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으로 그들을 징계하셨다.
#3 질투(16-18절)
다음은 질투의 죄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공동체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이 죄를 하나님은 즉각적인 심판으로 다스리셨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과하다거나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치 암 조직을 제거하는 의사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가운데 있던 치명적인 죄를 제거하셨던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우심 뿐 아니라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이어서 살펴볼 사건은 매우 잘 알려진 금송아지 사건이다.
#4 우상 숭배(19-23절)
시 106:19–20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20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범한 죄는 우상 숭배의 죄다. 20절의 “자기 영광” 즉 이스라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소의 형상으로 대신한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2계명을 어긴 죄이고, 이 사건은 출애굽기 32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세는 성막과 제사에 대한 여러 규례를 하나님께 받았고, 결정적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증거가 되는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내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급했다. 그들은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고 말했는데, 아마 모세가 산에서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서 금을 모아 아론이 만든 것이 바로 금송아지였다. 아론은 그 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하였다(출 32:4). 그래서 백성들은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방탕하게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
이들은 단지 모세가 산에서 죽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던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다른 지도자를 세워달라거나 아니면 아론에게 모세의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히 모세를 대신할 어떤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어떤 신을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달리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 송아지가 곧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여호와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 신은 ‘다른 신’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섬겼다. 이것이 우상 숭배다.
시편 기자는 이 역시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시 106:21–22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22그는 함의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
하나님을 잊은 자들이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던 것이다. 바울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가 다 이런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음을 지적했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우상 숭배다. 그것이 풀 먹는 소의 형상이든 어떤 다른 짐승의 형상이든, 사람의 형상이든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리가 다 이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때만 우상 숭배를 했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상 숭배에 빠졌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과도 같다는 칼빈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마음을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다른 것과 바꾸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눈에 보이는 무엇일 수 있다. 재물이나 집, 차와 같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유명인, 스타를 좋아하는 것이 어느 순간에는 우상 숭배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오늘날의 많은 우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 칭찬 받고 싶은 마음, 사랑 받고 싶은 마음, 행복하고 싶은 마음 등은 우리가 눈치 채기도 전에 우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하나님과 관련된 무언가가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십자가나 예배당, 성경책을 우상처럼 섬기는 사람도 있다. 목사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도 있다. 어떤 성도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도 있다. 교회에서 하는 사역을 우상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우상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밀어내면 우리는 무엇이든 계속해서 우상으로 만들 수 있다. 굳이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우상을 동시에 섬겨도 상관 없고, 우상을 계속 바꿔도 상관없다. 우상 숭배의 진짜 장점은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 숭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그렇게 스스로 만든 우상에게 결국은 끌려다니는 어리석음도 깨닫지 못한다. 여전히 ‘내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상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우상 숭배다.
우상 숭배는 우리에게 있어 어쩌면 너무나 흔한 죄여서 오히려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심각한 영적인 간음으로 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은 서로만 사랑하겠다는 결혼 언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배우자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영적 간음인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이보다 심각한 죄는 없다. 죄는 항상 관계에 문제를 가져오지만, 간음은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셨다.
시 106:2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
이것은 ‘마땅한 결과’였다.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와의 관계를 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잔인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을 사랑했다면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라. 21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일을 행하셨다. 22절처럼 기사와 놀랄 만한 일을 행하셨다. 그들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고 나서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라며 찬양했던 것이다(출 15:11). 누군가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어야했고, 누군가를 섬기고 따른다면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야했다. 하나님은 그럴 자격이 있음을 충분히 자기 백성들에게 증명하셨던 것이다.
그럼 애굽에서 나오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그냥 과거의 영광만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셨는가? 그렇지도 않다. 하나님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이 매일 먹을 것을 주셨다. 필요한 물이 반석에서 나오게 하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이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라며 반문했다(민 11:22).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민 11:23)
“여호와의 손”은 여호와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홍해를 건넌 직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었다.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 15: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는 하나님의 질문은 결국 이 모든 일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능력의 일들을 잊었느냐는 책망이었던 것이다. 모세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애굽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일하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 일들을 잊었고, 하나님을 잊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모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던 40일이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잊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꾼 죄에 대해서는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가 통할 수 없다. 그들이 멸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운명이 그러한 것도 너무 당연한 결과다. 핑계할 수 없다(롬 1:20).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보자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시 106:23 …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라는 표현은 일반적이지 않다. 출애굽기를 통해 이미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음을 알기에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시편 기자는 그보다는 더 극적인 표현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다.
“어려움”은 본래 의미는 ‘틈’이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은 모세가 “주님과 주님 백성이 틈 벌어졌을 때”라고 번역했다. 새번역은 좀 더 단순하게 모세가 “주님 앞에 나아가 그 갈라진 틈에 서서”라고 번역했다. 아마 이 번역들은 ‘틈’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틈으로 이해를 했을 것이고, 이 번역에 큰 문제는 없다. 실제로 그런 틈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이 단어를 통해 여기서 묘사하고 싶었던 모습은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슷한 맥락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신 말씀이 에스겔 22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 22:30–31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절의 “성 무더진 데”가 바로 그 ‘틈’이다. 즉 두 대상 사이의 거리보다는 원래는 있지 말아야할 벽의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성벽의 무너진 곳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에스겔 말씀과 여기 시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은 바로 그 성벽의 무너진 곳, 틈을 막아 서는 용사의 모습이다. 즉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용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성벽의 틈을 막고 성을 지키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죄악된 백성 사이에 선 중보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그들이 진노를 당했다고 말씀하신 것이고, 시편 기자는 모세가 그런 역할을 해서 당시의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출애굽기 32장의 상황을 보면 이렇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고 모세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모세 입장에서 손해가 될 말씀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출 32:11–13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세의 기도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명성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멸하지 않으셨다.
이 장면은 마치 하나님이 폭군이고 모세가 겨우 하나님을 진정시킨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 다만 중보자의 역할이 그러했다는 것 뿐이다. 모세는 그렇게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실 모세의 기도가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셨다면 이스라엘을 멸하셨을 것이다. 그들이 죄를 범했고 그에 대한 심판은 정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스라엘이 먼저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만 그 언약을 지켜야할 법적인 의무는 없었다. 하나님의 명성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모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신 것을 두고 다른 나라, 특히 애굽이 하나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편협한 생각의 결론일 뿐 진짜로 하나님의 명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즉, 23절 말씀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려는 마음 뿐이었는데 모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멸하지 못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세에 대해서 “그가 택하신”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셨고 그 모세를 통해서 오래참음의 은혜를 그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가 드러냈던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잊은 백성을 기억하시고 오래참으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기에 마땅하다는 의미다. 어떤 이유로도 그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롬 2:3–5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결국 모든 사람에 대한 성경의 결론은 이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나는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다.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상태에 있는 것으로 인해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지만 아무리 바울이라고 해도, 아무리 이렇게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낼 수 없다. 그 역시 정죄 받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던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세우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롬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이렇게 하신 예수님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원의 창시자”라고 표현한다(히 2:10). “창시자”(아르케고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는 우리의 절망 속에 예수님께서 뛰어 드셔서 그 절망을 헤치고 가장 먼저 살 길을 만들어 우리로 따라오게 하셨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구원의 영웅인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고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다. 예수님은 진노의 심판이 우리에게 떨어질 모든 틈을 그 몸으로 완벽하게 틀어막으셨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다른 것과 바꾸었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우상 숭배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즉시 멸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오래참으심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끝으로 그런 나를 위한 온전한 중보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롬 5: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를 보며, 우리도 같은 죄를 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