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 하라
본문: 요한복음 2장 1-11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한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말씀은 저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마음에 찔림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 자신을 돌아볼 때, 말씀대로 하기보다 마음대로 할 때가 많고, 그대로 하기보다 다르게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은 분명한데 나는 그렇게 하기 싫어서 갈등하다가 결국 내 고집대로 합니다. 그러고 나면 당장은 만족이나 즐거움이 있겠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난 우리에게 참 만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그분을 섬기며 따를 때 그분 안에서 참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욕심을 따르고 나의 마음에 세상이 주는 만족을 채우려고 하면 탈이 날수밖에 없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느라 탈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처방은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더욱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더해주고 그분을 향한 헌신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거하며 우리를 믿음으로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연약한 우리를 믿음으로 강하게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장엄한 서론으로 복음서를 시작했고 이어서 세례 요한의 증언과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증언들에 이어서 하나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마치 증언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요한이 한 주 동안에 있었던 일을 세심하게 기록하면서 그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사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둘째 날에는 세례 요한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셋째 날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넷째 날에는 예수님과 빌립과 나다나엘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들을 통해서 증언됩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넷째 날을 시작으로 삼일이 되는 날입니다. 첫째 날로부터 여섯째 날에 그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증거됩니다. 그 증거를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사흘째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가나는 요한복음에서만 언급되는 지역입니다.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킬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데,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가까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 있는 혼인 잔치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계셨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잔치에 초청이 되었습니다. 초청된 제자들은 앞서 언급된 다섯 명의 제자들,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요한일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마리아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항상 예수의 어머니로만 언급이 됩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 잔치에 먼저 참석 중입니다. 누구의 결혼인지 알 수 없지만, 이어지는 말씀에서 마리아가 잔치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했던 것을 보면, 마리아의 가까운 친척의 결혼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결혼은 부모들이 중매를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면 회당에서 서약을 하고 예물을 교환하고 신랑, 신부는 각자 자기 집에서 2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약혼의 기간으로 떨어져 지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부부 사이로 인정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약혼 기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되었지만, 아직은 각자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약혼의 기간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보통 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행진을 했는데,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이 오는 것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우리가 열 처녀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 후 신부의 집에 도착한 신랑은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신랑의 집에서 혼인 잔치가 시작됩니다. 혼인 잔치에는 가족과 친척들과 친구들이 초청되고 그 마을의 큰 축제가 되어 일주일 동안 계속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이러합니다.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중이었고 사람들의 축복과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잔치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에 문제없이 그렇게 혼인 잔치가 즐겁게 끝났더라면 이 말씀은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었기에 그 문제로 인해 우리가 가나의 혼인 잔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합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문제들을 만납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들은 참 싫지만,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내가 만들어가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혼인 잔치에서 어떤 문제가 주님의 이야기가 되었을까요?
요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문제는 이러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고 주인이 가지는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에 실패하는 것은 불명예였고 큰 수치가 되었기에 오랫동안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신부의 친척들이 신랑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긴급한 일이었고 빠른 대책이 필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일을 예수님께 전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이를 두고 약간에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그저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아무 기대 없이 지나가는 말로 알린 것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명령한 것을 보면 기대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마리아가 기적을 바라고 예수님께 사실을 알린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은 예수님이 전에 기적을 행하신 일이 없고 혼인 잔치에서 행하신 기적이 첫 번째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것을 미리 알고 요청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무난한 견해는 마리아가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기적을 행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지혜는 남달랐을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가 언제 과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 역할을 계속 감당하셨고 마리아는 특별히 장남인 예수님을 더 의지했을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물어보고 예수님이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자주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이 문제도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이 지혜롭게 해결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례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여러 질문들이 생깁니다. 한 주석가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 부분으로 생각해보면,
첫째, “여자여”
어머니에게 여자여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례한 말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쓸 수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두고 생각하면 이스라엘에서 이 말은 무례한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부르는 말로 어울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둘째 부분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구약에서도 나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 의미가 두 당사자 간에 거리를 두기 위한 표현입니다. 경우에 따라 어느 정도의 책망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의역해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될 수 있습니까!’ 공격적인 대답이 아니라 강직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계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셨기에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비추어서 마리아를 대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면, 마리아가 사랑하는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럴 수 없다고 고난의 길을 가는 아들을 만류할 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는 마리아의 아들로서 순종하셨지만, 이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 순종의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셋째,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여러 번 언급하십니다. 다섯 번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고(2:4, 7:6, 8, 30, 8:20), 세 번은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12:23, 13:1, 17:1). 복음서를 읽어가면 점점 더 이때가 다가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어지는 마리아의 반응을 보면 거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요청을 응답하시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예수님은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얻으시고 친히 혼인 잔치를 베푸시며 구약의 예언처럼(렘31:12; 호14:7; 암9:13-14) 포도주를 모자람이 없이 차고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의 즐거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서 때가 이를 때까지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렇게 반응합니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한 주석가는 마리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접근할 때는 책망을 받는다. 하지만 믿는 자로서 응답할 때는 그녀의 믿음이 존중된다.’ 어쩌면 아들에게 뜻밖에 말을 듣고 속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리아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그대로 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그녀의 말로 나타났고 그녀의 말은 하인들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요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요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합니다. 문제를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물을 채우라 하시니 물을 채웠고 갖다 주라고 하시니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해결되었고 지금껏 한 번도 본적 없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 기적의 실체는 연회장을 통해서 증거됩니다.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그 양이 풍족했고 그 품질은 최상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빈 항아리에서 포도주가 생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이 그 일을 직접 할 수 있도록 하셨고 그 결과를 직접 볼 수 있도록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 놀라운 일에 대해서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은 그 영광을 나타내셨고 그로 인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표적은 요한복음의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전반부에는 이 표적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7개로 보기도 하고 예수님의 부활까지 포함해서 8개로 보기도 합니다. 이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거되는 것입니다.
표적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가리키는 것이 있기에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적을 볼 때, 표적이 가리키는 것을 봐야 합니다. 표적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그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표적은 누군가를 믿음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표적에 대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당한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표적을 통해서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표적->믿음).
뿐만 아니라 표적은 믿음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믿음->표적).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에 따라 표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표적을 가져오고 표적은 믿음으로 이어지며 그 믿음은 더 큰 일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복잡한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그대로 하게 합니다. 순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그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 말씀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럴 때 내 삶에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내 삶에 기적 같은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행할 때 주님께서 우리 믿음을 아시고 그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뜻대로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따라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걸음을 더욱 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향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주님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따라 그대로 행하는 것이 참 복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