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구원에 합당한 삶 PART I
본문 : 베드로전서 1:13-17
설교자 : 조정의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13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1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사도 베드로가 그동안 1~12절에서는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에 대해 찬송했습니다. 처음 인사말부터 복음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태초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실 것과 예수께서 피뿌림으로 구원하실 것을 미리 예정하셨으며, 우리가 바로 그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12절까지가 그런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부터 신약의 전도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러므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엄마는 자녀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말하면서 엄마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합니다. 신약의 많은 성경이 이와 같은 구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찬송하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11장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 저자는 롬12:1에서 “그러므로”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엡4:1에서도 그 전까지 복음에 대해 강조하다가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삶,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골3:1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과 은혜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 말씀이 부담스러운 의무처럼 들릴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충분히 묵상하시고 그것에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본문 말씀을 시작하길 원합니다.
13절에서는 세 가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으니 이 세 가지를 순종하라,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은 “온전히 바랄지어다”(13)이고, 두 번째 명령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이며, 마지막 세 번째 명령은 “두려움으로 지내라”(17)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성도들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 구원의 은혜를 맛보았다면 그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다”는 허망한 기대가 아닙니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학교가 쉬었으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강한 확신으로 그것이 당연히 일어날 것을 믿으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감정 뿐만 아니라 의지로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는데 “온전히”라는 말도 역시 ‘완벽하게’ ‘완전히’라는 말입니다. 은혜를 ‘완벽하고 단단하게 붙들어라’, ‘마음을 고정시켜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조금의 의심도 불확실함도 없습니다. 이것을 히6:19에서는 “영혼의 닻”이라고 표현했고, 골1:23에서는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삶에 이런 확신과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소망과 기쁨이 있는가, 강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라고 하는데, 그런 큰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중심이므로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지?’라고 생각하며 그 사실에 놀랍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의 밭에도 비를 주시고 그들의 건강을 붙들어주시며 우리의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바라라고 했던 은혜는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특별한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1:10) 은혜는 바로 예수님이 고난과 영광을 통해 이루실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가져다 주실 은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4)와 같이,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5)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 구원의 즐거움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구원의 절정, 최고의 기쁨과 축복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기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좀 지쳐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만 기억하고 그것만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천국을 떠올리면 지긋지긋한 이 세상을 벗어날 도피처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온전히 바라고 소망하라는 이 “은혜”는 그것 이상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최고에 이르는 상태, 완성된 구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했던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통해 어떤 은혜가 임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것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된 구원의 모습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소망과 기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의 즐거움을 상기해서 그 미약한 즐거움으로 겨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소망이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바라며 누릴 수 있고 또 누리게 될 구원입니다.
약1:6-8에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며,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 마음을 두고 염려하기 때문에, 마음에 정함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구원이 이뤄질 그날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구원에 합당한 성도의 자세는, 그것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확신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소망을 붙들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 “동이다”는 말은 단단히 졸라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겉옷은 길이가 길어 어떠한 행동을 취할 때 옷을 가다듬고 띠로 둘러매었습니다. 또한 유월절에 피를 바르고 마지막 식사를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준비된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깨어있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정신을 차려라’,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깨어서 한 가지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베드로가 그것을 기억하고 썼는지도 모릅니다. 비유로 말씀하실 때 주인이 곧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6)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르게 분별하라”(롬 12:2),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라”(마 6:33), “죄와 헛된 것들을 벗어버리라”(히 12:1), “위의 것을 생각하라”(골 3:2-4), “진리의 띠를 띠라”(엡 6:14). 우리의 여러 잡다한 생각들, 마음과 정신을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가다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과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잡아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 살아가는 모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와 같습니다.
딤후3장에서는 말세를 가리키며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신의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 계속해서 말씀은 들으나 경건한 삶은 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다른 것들도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시에 사랑하고,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정함이 없고 경건의 능력이 없으며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사로잡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에 앞서 새로운 사람을 입으라고 한 것처럼,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꾼 뒤에 순종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가져다 주실 구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교회 안의 많은 분들이 “주님이 계신다”, “하나님을 바라봐라”,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부 열심히 해라”, “세상에서 살려면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영적인 가치를 바라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말세의 때와 같이 하나님과 동시에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라”(13)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술에서 깨는 것이고 또렷하고 멀쩡한 상태를 말합니다. 앞에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하여 마음과 생각을 정돈했다면 이제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열심히 동여매도 곧 느슨하게 풀어지게 만드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오늘날 ‘너도 진리이고 나도 진리이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세상의 시작은 진화론이라는 주장을 대부분의 신학교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많은 철학과 속임수들이 믿는 자들의 생각과 사고를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하라”(딤전 6:20). 이것은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해도 ‘내 생각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흡수한 거짓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우리는 주일에 말씀을 듣고 마음의 허리를 동인 뒤 다음날이 되면 사람들로부터, 미디어를 통해,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으로 수만 가지 거짓된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정돈된 마음을 흩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베드로가 사용한 “근신하라” 즉, 술에서 깨듯이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죄악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심리학, 문화, 영화, 드라마 등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것들은 진리가 아닌 거짓에 취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1:23),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나는데 필요한 것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갓난 아이처럼 복음에 합당한 삶과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고 우리를 늘 깨어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지만 나는 공부하는 체질이 아니다’, ‘공부는 중요하지만 피곤해서 못하겠다’,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공부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이 독한 세상에서 어떻게 취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밤늦게 자고, 그 말씀을 읊조리기 위해 새벽녘에 깨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질 구원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구원에 합당한 삶에 첫 번째 행동은, 장차 우리에게 주실 은혜, 즉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세상의 방해들이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키우는 방법도, 잘못된 가르침에서 피하는 방법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늘 묵상하시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