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 나의 사랑 나의 사명
본문: 디모데전서 3장 14~4:5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필립 얀시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을 참고했습니다. 말씀의 제목이 얼마나 공감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대해서 ‘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요? 교회에 대해서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 있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질문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매주 유평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며 봉사하고 여러 활동들을 하며 교회라는 공동체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교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함께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오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좋은 곳이기에 많은 공격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좋은 곳이기에 변하기 쉬운 곳이고 문제가 많이 생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처럼 자격 있는 사람들을 모집해서 서열을 매기고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오해하면 교회에서 엉뚱한 것을 기대할 수 있고 엉뚱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3장의 마지막은 편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편지를 쓴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세 가지 표현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알 때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나의 사랑 나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은 물론, 우리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3장 1절에서 13절까지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언급했었는데 이제는 자격을 갖춘 일꾼들이 함께 섬겨야 하는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14-15)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기를 원했지만, 직접 에베소를 방문해서 교회의 문제들을 직접 해결하고 디모데를 돕기를 원했지만 직접 방문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언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선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남긴 이 편지는 디모데뿐만 아니라 그 후로부터 계속 지금 교회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의 기준이 되고 행동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주기 이전에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교회에 대한 정의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집,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러분은 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집이라고 말했을 때, 그 집은 건물을 말할 수도 있고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 혹은 가정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이 나왔는지 생각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집이라는 표현도 그러합니다. 집이라는 말씀이 있을 때 건물을 말할 수도 있고 가정 혹은 가족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앞뒤 문맥에서 이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봤을 때 특별히 3장에서 집이라는 표현은 이미 여러 번 나왔습니다. 일꾼의 자격을 말하면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집을 다스리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5절에 나오는 집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원어적인 의미와도 잘 어울립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 부르셨고 하나님 한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육체의 부모는 다르지만, 태어난 시기와 장소, 나이와 성별, 기질과 성격도 다 다르지만, 그 모든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동등한 신분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으로서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관계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사랑으로 섬기고 서로에 대해서 사랑으로 돌보고 서로에 대해서 사랑으로 세워주고 격려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내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느끼고 계십니까? 단지 주일에 혹은 수요일에 잠깐 교회에 왔다 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더 많은 일을 함께 하고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역모임이든지 부서별 모임이든지 교회학교에서든지 성경공부든지 어떤 모임이든지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며 교제하며 삶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족임을 느끼며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둘째로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이방나라가 섬기는 우상과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대조할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거짓 신과 달리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삶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주중에는 각자 흩어져 지낼 때에는 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실제로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우리가 모여서 함께 할 때, 우리가 교회로 함께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다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경배하며 그분의 임재하심 가운데 그분을 높입니다. 떡과 잔을 통해서 주님이 하신 일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내 안에 계심과 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경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도다’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까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는 이 자리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기둥은 지붕을 튼튼하게 받쳐 주는 역할을 하고 뿐만 아니라 건물을 높이 올려서 멀리서도 건물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터는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기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견고하여서 흔들림 없는 건물의 대들보처럼 교회가 진리에 대해서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교회는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진리를 튼튼하게 지켜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진리를 높이 들어 올려서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에 대해서 가지는 두 가지 임무는 진리를 굳게 지키는 것과 진리를 널리 전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진리를 지키고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가 교회를 지키는 건가요? 교회가 진리를 지키는 건가요? 진리로 교회를 세워야 하나요? 교회가 진리를 세워야 하나요? 다시 말해, 진리가 교회를 지킵니까? 교회가 진리를 지킵니까? 둘 다입니다.
교회는 진리 위에 서있고 진리를 의지하며 진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교회의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교회는 진리를 굳게 지키고 진리를 세우며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교회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교회를 지키는 생명이자 교회가 지켜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어지는 질문은 이것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지켜야 하고 널리 전파해야 할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찬송을 인용함으로써 이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16)
첫째, 진리는 비밀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누구도 이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둘째, 진리는 경건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경건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셋째, 진리는 모든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모든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것입니다.
바울이 찬송으로 말하는 진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이 찬송은 헬라어로 열여덟 단어로 아주 짧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여섯 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마다 운율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여섯 행 모두 “떼”로 끝나는 동사로 시작하고 동사 모두 부정과거 시제이고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맞춘 것입니다. 여섯 행 모두 같은 형태로 된 명사로 끝나고 하나를 제외한 모든 행에서 같은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두 행씩 짝이 되어서 대조되고 있습니다. 육신과 영이 대조가 되고 천사들과 만국 그리고 세상과 영광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정교하게 구성된 찬송은 당시 성도들이 진리를 기억하며 전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입니다. 가장 위대한 경건의 비밀입니다. 세상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헛된 것을 좇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로 이 비밀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천 년 전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아서 성령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일은 세상에 전파되었고 사람들에게 믿은 바가 되었고 믿는 자들의 구주와 주님으로서 영광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 중에 신앙을 고백하며 부른 이 찬송은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진리 되신 주님을 높이며 진리 되신 주님을 세상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진리를 굳게 지키며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교회를 어렵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1-2)
여기 “후일에” 라는 말은 말세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성령이 밝히 말씀하신 그 때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고 마귀에 속아 넘어가고 귀신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이러한 거짓은 처음부터 대놓고 거짓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속이기 위해 거짓말하며 교활하게 그럴듯한 모습으로 꾸미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속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떠난 자들에게 대해서 자기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하는데 “화인을 맞아서”라는 말은 ‘벌겋게 달구어진 쇠로 지지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화인은 주인이 누구인지를 표시합니다. 그리고 화인을 맞은 곳은 신경이 죽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성령의 인침이 아닌 마귀의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마귀이고 자신이 마귀에 속한 자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은 양심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서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양심이 있는 사람인가? 저 사람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양심이 무뎌진 사람인지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인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인지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미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전하는 거짓 가르침과 삶의 방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꿉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멍에를 씌우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마귀와 악한 영들을 따르는 거짓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있었던 거짓 가르침의 예를 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한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육체가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를 정죄하며 나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욕과 식욕에 대해서 몸의 욕구를 채우는 일을 악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금하고 음식을 먹는 것, 특별히 육식을 금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이런 거짓에 넘어가지 않고 그들이 만든 잘못된 기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결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부라는 관계 안에서 성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음식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감사함으로 받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의 거짓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진리를 무너뜨리고 온갖 종류의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갈수록 더 치열해질 것이고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 활동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취미에 따라 맞는 일을 찾아서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가족입니다. 우리는 가족으로서 서로를 위해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위해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서로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성하고 또한 함께 하는 일에 힘을 다할 때 그럴 때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에 대해서 교회, 나의 사랑 나의 사명 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