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를 낳는 교회
본문 : 사도행전 11장 19절~30절
설교자 : 조 정 의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치사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전염 성 때문이다. 확진자와 접촉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매우 높다. 성경엔 “전염병 같은 자”라 불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사도 바울이다(행 24:5). 9장에서 회심한 후 사라졌다가 오늘 본문에 재등장한 사도 바울은 13장부터 사도행전의 주연으로 활약하여 천하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염시킨다. 아시아, 유럽등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운 바울은 흥미롭게도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 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한 말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역사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새로운 교회를 자라나게 하시는 일에 예루살렘 교회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로 사용하셨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낳고,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교회를 낳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이다. 오늘 말 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 시는지, 우리가 그 귀하고 경이로운 역사에 어떻게 심는 이, 물 주는 이, 섬기는 이로 동참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길 원한다.
1. 심는 교회(19-21)
새로 교회가 탄생한 도시는 안디옥이었다. 오늘날 터키의 남동부 위치한 시리아(수리아)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가장 큰 대도시였다. 인구 약50만명으로 유대인과 유대인으로 개종한 이방인,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상업과 문물, 문화가 많이 교류되는 도시로 페르시아, 인도, 중국에서 온 동양인들도 있었다(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도시). 헬라파 유대인 과부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가 뽑은 일꾼 중 니골라가 바로 안디옥 출신이었다(행 6:5).
예루살렘에서 약480km의 거리에 떨어진 안디옥에 어떻게 교회가 탄생했을까? 예루살렘 교회가 그곳까지 가서 복음의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19절에 보면 “그 때에”라고 시점을 언급하는데, 이는 사도행전 8장 4절과 연결되어 있다. 스데반이 죽고 사울을 필두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도 외에 모든 성도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고, 그 흩어진 성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행 8:1-4).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19절). 흩어진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었다.
흩어진 성도들 중에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에 이른 사람이 있었다. 베니게(페니키아)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갈멜산에 이르기까지 좁고 긴 지중해 동쪽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인 도시로 두로, 시돈 등이 있다. 구브로(키프로스)는 시리아 해안에서 지중해상으로 떨어져 있는 큰 섬으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다(행 4:35).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800km 지점의 북아프리카 해안 도시) 출신 성도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인(순수 이방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20절). 아마도 이방 지역 출신으로 헬라인과 교류하는데 익숙했던 성도들이 헬라인에게 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 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인정한 것을 전해 들었을 지도 모른다(행 11:18).
중요한 것은 교회를 낳은 것이 교회라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가 전파한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안디옥 교회를 낳았다. 하지만 단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니다. 21절을 보라. 주 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 오더라. 결국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은 주님의 손이 어디든 가서 제자로 삼는 일에 충성한 교회와 함께하신 것이다(마 28:18-20).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와 안디옥 교회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심었고 하나님이 안디옥 교회를 낳으셨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 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여기 보내심을 받은 교회가 있다. 그들은 선교 전략에 따라 파송 된 것도 아니고, 많은 계획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았다.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한것도 아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안전한 삶, 정착된 삶,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보다 부르심에 따라 전파하는 삶을 살았다.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를 심었다. 주님은 그들의 충성스러운 전도를 통해 안디옥의 많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셨다. 교회를 세우셨다.
후에 성령께서 이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디아, 유럽, 아시아 온 지역에 보내어 복음을 심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곳곳마다 교회를 세우셨다. 계속해서 교회가 교회를 낳게 하신 것이다. 우리 교회도 신실한 교회가 낳은 결실이다.
교회를 탄생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놀라운 일을 심는 이를 통해 하신다. 교회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 또 다른 교회를 낳게 하신다. 당신은 이 영광스러운 일에 기쁨과 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복음의 씨를 말과 삶으로 심고 있는가? 당신의 발은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인가? 당신의 주변인은 듣고 있는가?
2. 물 주는 교회(22-26)
하나님은 심는 자를 통해 교회를 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물 주는 자를 통해 자라나게 하신다. 안디옥에 교회가 태어났고 이제 그 들을 돌볼 일꾼이 필요했다. 그런데 교회를 돌보는 그 일에 누가 헌신했는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이다(22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안디옥 교회)을 듣고 무엇을 했는가? 안디옥까지 그들을 돌볼 (물 줄) 일꾼을 보냈다. 그 일꾼의 이름은 바나바였다(22절).
바나바는 교회를 돌보고 세우는 일에 적격이었는데 24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누가는 ‘착하다’는 이 칭찬을 바나바에게 독보적으로 사용했다.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행 4:36), 그만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품고 돌보는 목자의 마음을 가진 일꾼이었다(사울, 마가 요한). 또 한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24절). 삶이 경건하고 말씀의 진리 가운데 거하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성도를 주님과 동행하도록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이르러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 물러 있으라 권했다(23절). 주님은 바나바를 통하여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키셨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지더라(24절b, 신적 수동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자라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라는 일꾼을 통해서. 교회는 물을 주 는 역할을 했고, 하나님은 교회를 자라나게 하셨다.
교회의 수가 급격히 성장하자 바나바는 동역자가 필요했다. 그 때 바나바가 떠올린 사람은 사울이었다(25절).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교제하게 한 이가 바나바였다(행 9:27). 그런데 예루살렘 유대인의 박해로 사울이 다소로 쫓겨난 지도 거의 7-8 년이 되었다. 사울은 정통 유대교 랍비였다가 회심한 후 양쪽 공동체의 미움을 받고 고향으로 도태되어 있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예수께서 그를 이방인을 위한 일꾼으로 삼겠다고 부르신 뒤 10년 동안 아무런 기회가 없던 때였다. 그런데 바나바가 하나님의 때에 사울이 있는 곳을 찾아 다소에 가서(160km)그를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온 것이다(26절).
사울(바울)은 가르치는 은사가 탁월했는데(행 14:11, 루스드라에서 헤르메스라 불림, 말하는 자), 바나바와 일년간 둘이 안디옥 교회에 모여 있어 동역하며 큰 무리를 가르치는 일에 최적의 일꾼이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는 수적인 성장뿐 아니라 영적 성장을 이루었는데,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26절). 이는 안디옥 교회가 유대인 공동체도 아니고 헬라인 종교도 아니며 인종과 문화와 민족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추종하고 따르고 믿는 공동체의 특징을 보였기 때문이다. 안디옥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자랐다.
교회를 자라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성령과 믿음 이 충만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이들을 세워 교회를 돌보고 세우고 성장하게 하신다. 안디옥 교회 교사였던 사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세우라고 명한 일꾼들의 자격을 보라(딤전 3; 딛 1).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그리고 말씀에 충만하여 가르치는 일에 은사가 있는 자들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물 주는 일꾼 들을 교회에 세우시고 이를 통해 교회를 자라나게 하신다.
어쩌면 당신은 ‘나는 일꾼이 아닌데,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데’라 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바나바처럼 위로의 은사가 있을 수 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착한 성품으로 성도를 주님과 동행하도록 돌보고 격려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적어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자녀들에게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할 수 있다(엡 6:4). 교회 학교 교사는 맡겨진 영혼들을, 구역장은 구역 식구들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과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명령의 핵심 명령어는 “제자로 삼아”이다(마 28:19). 교회는 계속해서 제자로 삼는 일을 한다. 당신이 제자로 삼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에게 물을 주는 일을 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자라나게 하시는 영혼은 누구인가?
3. 섬기는 교회(27-30)
안디옥 교회는 성장하여 이제는 복음 사역을 돕고 동참할 정도가 되었다. 27절을 보면 그 때에 곧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렀다(27절). 당시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라 몇몇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선포하는 일을 했다(참고 고전 12, 14장). 선지자들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기를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라고 했다(28절). 누가는 아가보가 말한 그 흉년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일어났다고 말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41~54년 네로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황제 로 재위 기간 중 46년경 큰 흉년이 일어났다. 요세푸스는 당시 흉년이 너무 심해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여왕이 옥수수와 무화과를 사서 보급했지만, 결국엔 많은 사람이 극심한 흉년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떻게 했는가? 이것을 주목하라.
29절을 보면 그들은 각각 그 함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 조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자발적으로 유대에 사는 형제자매를 돕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를 돕는 일이었는데, 그래서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의 대표인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보냈고 예루살렘 교회 대표인 장로들에게 보냈다(30절).
이것은 일차적으로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복음의 은혜를 끼친 교회에 보답하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복음의 동역이라 말할 수 있다. 안디옥 교회는 여기 저기 흩어진 불특정 다수의 성도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를 정하여 돕기 원했다.
바울은 종종 자기에게 부조한 이들을 복음의 동역자라 불렀다 (롬 16:3, 9, 21; 빌 4:3; 몬 1, 24).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 디도를 통해 바울의 쓸 것을 도왔고(빌 2:25),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두 번이나 바울의 쓸 것을 보냈다(빌 4:16). 마찬가지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필요를 채워 그들이 심고 물 주는 일에 동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성령의 명령에 따라 파송하여 복음을 심고 물 주는 일에도 동참하지만, 그 전에도 그들은 최초로 복음의 은혜를 끼친 예루살렘 교회의 사역에 섬김과 후원으로 동참하길 원했다.
코로나 사태에도 교회가 모이려 하자, 세상은 헌금 때문이라며 교회를 비방했다. 하지만 헌금은 단순히 일꾼의 삯이 아니다. 교회 월세나 운영비가 아니다. 헌금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제물이며 동시에 교회의 복음 사역에 동역하는 섬김의 일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할 때 자발적인 구제와 섬김이 교회 내에 풍성하게 일어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을 도운 것처럼, 세워진 각 교회들이 복음의 동 역자들과 그 파송 교회를 후원하여 복음이 천하에 심겨지는 일에 동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시는 역사에 교회는 심고, 물을 주고, 섬기는 일로 동참할 수 있다. 당신은 직접 심고, 물 주는 일에 자신이 없어도 섬기는 일과 후원하는 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라나게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으로 어떻게 섬기겠는가?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마 16:26).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다(마 18:13).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다니신다고 하셨 다(눅 15:4).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귀히 여기사 찾아 구원하신 영혼들이다. 누군가 심었기에, 물 을 주었기에, 섬겼기에 당신은 거듭나고 자라난 것이다. 그런 당 신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무엇을 주고 있는가? 무엇을 혹 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교회를 통해 교회를 낳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