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책임
본문: 시편 78편
설교자: 최종혁
아삽의 마스길
- 아삽의 시편
- 119편을 제하면 가장 긴 시편(72절)
-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는 역사시.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다윗 왕조가 세워지는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
- 77편은 마치 78편의 서론과도 같은 면이 있기도 하다.
- 77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과거를 바라보았다면, 78편은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엇보다 78편은 ‘마스길’, 즉 교훈시로서 그 메시지가 매우 명확하다. 과거를 기억하여 미래 세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에 있다.
시편 78편은 크게 보면 이 교훈을 1-8절에서 말하고, 나머지는 이에 대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9-11절은 에브라임 지파가 이 교훈을 따르지 않은 것을 언급하고 67-72절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택하지 않으시고 유다와 다윗을 택하신 사실을 언급하여, 에브라임을 하나의 본보기(반면교사)로 제시한다. 오늘은 1-8절을 통해 아삽이 전한 교훈을 함께 살펴보자.
교훈(1-8절)
1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먼저 저자는 “들으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시를 시작한다. 사실 시편에서는 “들으라”, “귀를 기울일지어다”의 대상이 주로 하나님이셨다. 고통의 소리를 들이시고 귀를 기울여달라는 탄식의 시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대상이다. 아삽은 하나님의 선지자처럼 대언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들으라고 강조한다.
사실 잠언이나 욥기와 같은 지혜 문학을 보면 이와 같은 표현이 자주 나온다. 편지의 인사말처럼 지혜 문학에 포함되어야 하는 문학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에 인사말이 중요한 것처럼 지혜 문학에서도 이런 “들으라”는 명령은 중요하기 때문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단은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 맞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다원화, 탈권위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은 점점 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더구나 많은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모두가 전문가가 되어 더욱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뉴스에 나오면 신빙성이 있다고 다들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유튜브 보면 그렇지 않던데라는 말이 훨씬 쉽게 나온다. 뭐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남의 말을 순수하게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가 지금의 문화가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을 확인하고 분별력 있게 판단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그런 경향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못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오늘날의 문화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애초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같은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의 많은 성경 학자들은 성경을 그저 고대 문서 정도로 취급하려 한다. 잘 보존된 쓸만한 고대 문서인 것이다. 당시의 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고 그 문화 안에서 의미가 있었던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 적용될 수 없는 내용들이 태반이라고 주장한다. 모세는 고대의 세계관에 갖혀 있었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한 것 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당시 문화에서는 혁명적일 수 있는 성적 가치관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가부장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했고 성적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때로 성도들 중에서는 성경을 부적처럼 대하는 경우도 있다. ‘말씀을 붙들어라’는 말은 어떤 말씀을 잘 암송하거나 잘 보이는 곳에 두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이 부적처럼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수험생, 고시생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가 부적이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는 부동산 하시는 분들이 좋아할지 모르겠다.
성경 말씀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만 찾아 읽는다. 누군가는 아내나 남편을 책망하기 위해 그에 해당되는 말씀을 찾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나의 권위 아래 말씀의 권위를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성경을 도덕책처럼 생각한다. 그저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사느냐’는 식의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이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들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삽은 지금부터 자신의 입으로 할 말의 권위가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며 이 시편을 시작했다. 우리도 그렇게 이 시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아삽은 자신이 지금부터 비유로 말한다고 한다. 이 말은 비유적으로 말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예를 들어 말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말하겠다는 의미다.
아삽은 그 내용을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도 표현했다. 이 말도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비밀’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3절이 그렇게 말한다.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즉,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역사적 사실 관계를 밝히려는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그 역사 안에 내포된 의미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 안에 있는 의미를 강조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 듣는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그 의미를 적용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삽은 그냥 ‘우리가 다 아는 얘기, 아는 역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고 표현했다. 여기에 지금 말하고 싶은 핵심이 있다. 지금부터 그가 말할 비유, 그가 드러낼 역사적 의미는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다. 즉, 그는 눈으로 본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은 것을 말할 것이다. 그의 부모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그의 부모는 또한 그들의 부모에게 들었을 것이다.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그렇게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이야기고 그를 비롯한 그 시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할 이야기라고 아삽은 말한다.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우리가 전해 들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도 숨기지 않고 전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아삽은 세 가지 다른 표현을 통해 강조했다. “여호와의 영예”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다. “그의 능력”는 하나님께서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직접 행하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은 그 일이 구원의 일이며 당연히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라 놀라운 일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모두의 책임이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 사실을 숨기지 말아야 하고, 자녀는 그 이야기를 그저 지나간 일, “라떼의 추억”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고 미래 세대에 그 하나님을 전해야 할 분명한 책임이 있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면서 현재 우리의 책임으로서 언급되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후손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 주어야할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 좋은 나라를 물려 주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 좋은 것들이겠지만, 정말 좋은 것,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이 맑은 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볼 수 있게 해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미세먼지 없이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깨끗한 공기를 물려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완벽한 사회 정의가 실현된 나라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지도 않으셨다.
그것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해서도 아니다. 이 땅의 청지기로서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그런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우선순위는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그런 나라다. 오염되지 않은 나라다.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에 우리는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이 땅에서 장차 임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라고 명령하셨다. 우리에게 있는 자원, 시간이나 재물, 에너지, 재능 등을 다른 일에 먼저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책임, 특히 여기서는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책임에 사용해야 한다. 거기에 우리의 우선순위가 있어야 한다.
5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모든 역사와 가르침을 자녀들이 잊지 않도록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신명기 6:4-9이다.
신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20–25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구약의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옛언약의 백성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 아이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적으로는 태어나는 것 만으로도 언약 공동체 안에 있지만, 영적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면서 회개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기나 다른 관습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졌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의미가 있었고, 장막절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기억하게 했다. 그들이 행했던 할례도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 못했다.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앞서 말했던 절기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나님은 자녀 양육을 부모의 책임으로 주셨다.
오늘날도 비슷하다. 성도의 자녀들은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듣게 되고 어느 시점에서는 마치 교회 성도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건전한 가르침이 있는 성경적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해도 진정한 성도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부모다.
과거 자녀 양육은 어머니의 일인 것처럼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에게 “집에서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거야!”와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일차적으로 자녀 양육은 아버지의 책임 아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녀 양육의 책임은 가장인 아버지에게 있다. 그래서 바울은 부모에게 주는 명령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기록한 것이다(엡 6:4). 가장의 책임 아래서 부부가 함께 자녀 양육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요즘은 직접적인 자녀 양육을 부모가 최대한 적게 하는 경우도 많다. 부모는 경제 활동을 하고 그 돈으로 자녀들은 여러 가지를 배운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사정이 있지만, 심각하게 고민해야봐 할 부분이다. 부모가 해주기 어려운 것들을 전문가들을 통해 해줄 수 있고 그런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부모가 해야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유모, 보모, 보육 교사, 교회 학교 선생님 등에게 그냥 넘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모든 것들은 보조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거기에 그냥 맡겨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자녀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믿는 가정 안에도 아이의 자율권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어려서 부모님이 강압적으로 교회에 데리고 나가고 했던 것에 대한 안좋은 기억에 있어서 자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교회에 가지만 자녀에게는 선택권을 준다고 한다. 아이를 존중하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참 좋고 사실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가 연약하기 때문에 내 물건 다루듯이, 내 소유물처럼 여겨서는 절대 안된다.
하지만 ‘양육’에는 어쩌면 ‘강요’처럼 보이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말을 가르칠 때도 우리는 강요한다. 이렇게 발음해야 한다고,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양육에는 그런 요소 있는 것이고 그것을 ‘강요’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다만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을 자녀에게 소개하는 것, 알게 하는 것이다. 내 말과 내 삶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나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이유으로 집에서 성경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그 귀한 시간 동안 사탄은 최선을 다해 자녀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가르치고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바빠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 한번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때도 사탄은 결코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진화론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동성애는 해가 없다고 생각하고 결혼은 미친짓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탄도 마찬가지다. 페어게임같은거 없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언제 스스로 종교를 결정할까? 이미 그 아이가 어렸을 때 결정은 끝났다. 우리는 세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가지고 세상과 싸우고 있음을 있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에게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다. 다른 모든 것이 없어도 나의 자녀가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임은 계속된다.
6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러니 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이 책임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얼마든 관계 없다. 70이 넘었던 10살도 안되었든 우리는 다 이 책임을 지고 있다. 자녀에 대한 말을 길게 했지만, 사실 자녀가 있든 없든 그것도 상관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나의 자녀에 대한 책임이 있고, 공동체적으로 우리의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함께 지니고 있다.
아삽은 하나님을 알게 해야할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다.
7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간단히 정리하면 믿음과 순종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확신의 의미가 더 강하다(우리말 성경,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의 표현에 따르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순종이 따라올 수 없다. 그것이야 말로 강요이고 아무 의미 없는 종교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들은 하나님, 우리가 본 하나님을 가르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 간다면,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는 미래 세대에 대한 그런 책임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삽은 경고의 말씀도 잊지 않았다.
8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9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이 경고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예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자녀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반복되었던 그 잘못된 역사를 그들의 시대에 반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편 시간에 나누게 되겠지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으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가, 나의 손주가, 친구가, 교회 학교 학생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충성하지 않는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게 하는 것이다.
도전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니 내일이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용돈이나 선물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다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아이에게 선물을 줄 때마다 그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서 한편으로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게 정말 좋은 선물일까’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면 됐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가 볼 때 별로 가치없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 내 삶에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녀에 대해, 미래 세대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전해진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그들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장난감 하나 사주지 못한 것. 어린이 날에 좋은데 놀러가지 못한 것. 부모로서 좀 미안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자녀의 인생에 있어 큰 트라우마가 되어 자녀의 인생을 망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드러내 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선물을 사주고, 좋은데 놀러가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게 돕는 것입니다. 내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녀의 영원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녀를 구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소개하고 알게 할 책임이 나에게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그 책임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은혜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