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겸손으로 하나되어 얻는 기쁨
본문 : 빌립보서 2:1-11
설교자 : 이 병 권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일본 사람이 세 명 모이면 회사를 세우고, 중국 사람이 세 명 모이면 식당을 세우고, 한국 사람이 세 명 모이면 교회를 세운다. 그런데 이 교회는 얼마 후에 세 개로 갈라진다. 이런 풍자가 있는 것은 많은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나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오늘날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러한 교회의 문제는 오늘만의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늘 있어왔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의 제목이었고, 기쁨이었던 빌립보 교회. 그런 빌립보 교회도 하나 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성도들 간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교회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불러낸 무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목표를 향해 하나가 되어서 함께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야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제 가을이 되어 날이 추워졌고, 겨울 철새들이 우리나라로 날아옵니다. 이 철새들은 때마다 먼 곳으로 이동하는데 무리를 지어서 함께 날아갑니다. 연구에 의하면, 철새는 함께 날아가기 때문에 혼자 날 때보다 75%를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함께 날 때 더 멀리 더 효과적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더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학생회는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계획했던 코스를 놓치고 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산의 정상을 보고 내려와서 또 다시 산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산을 오르면서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솔직한 감정을 담아서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정말 이 길이 맞아요? 그냥 내려가면 안돼요? 이건 꿈이다. 그냥 탈출하고 싶다. 배고파!” 그렇지만 마침내 우리 학생들은 해냈습니다. 혼자였으면 절대로 못했을 일인데 함께 하니까 결국 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이길 바라십니까?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협력해야 합니다. 함께함으로 도와주고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읽어도 비슷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고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절에서 4절까지는 원래 한 문장인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4절 끝에 있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명령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이 명령이 2절 처음에 있는데, 번역하다보니 4절 마지막으로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명령은 개인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쁨을 위한 일이기에 이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1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이 명령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부했던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라는 명령과도 연결됩니다. 1장 27절에는 한마음으로,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명령은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가 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이 강조됩니다.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 때 겪게 되는 다양한 어려움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 보면 때로 고난을 경험합니다. 대적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힘들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 일을 위해 수고하게 하는 것은 네 가지 영적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1절 마지막에 “있거든”이라고 번역 한 것을 좀 더 정확한 의미로 말하면, “있기 때문에“ ”경험하고 있으므로”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을 풀어서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권면을 경험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랑의 어떠한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령의 어떠한 교제를 경험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떠한 긍휼이나 자비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권면, 사랑의 위로, 교제, 긍휼과 자비. 이것이 하나 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권면하시고, 위로하시며, 우리와 교제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성도들과 나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교제하며 그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격려하셨듯이 나도 누군가를 격려하고, 주님이 나를 위로하셨듯이 나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긍휼과 자비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주님과 새로운 관계로 맺어진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겁니다. 다른 배경과 개성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각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어떤 성격이든지, 어떤 성별이든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든지, 어떤 직업이든지, 축구를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관계없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든지 관계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드는 기초입니다. 그럼 이 기초 위에 우리가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다음으로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합니다.

2절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사도 바울은 같은 마음, 같은 사랑, 한 뜻, 한마음을 언급합니다. 먼저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것은 같은 생각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어떤 것을 보는 시각이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각자가 특별하고 다릅니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재능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제 딸들이 서로 어떤 동물을 좋아하는지 물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토끼, 오리, 거북이,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물어봅니다. 아빠는 어떤 동물을 좋아해?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소” 한 가족이지만 정말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 교회는요?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모여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룹니다. 당연히 모두 다 똑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같이하라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같은 사고방식으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전인격적인 하나 됨을 추구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까지 서로 조화를 이루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원리를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생각과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 됨의 원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제 보다 실제적인 하나 됨의 방법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바울은 다툼과 허영을 겸손과 대조하면서 겸손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여기서 다툼은 이기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뭐든지 하려고 하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입니다. 그리고 허영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며 자신을 자랑하며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겸손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낫게 여긴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위에 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나보다 더 위에 둔다는 겁니다. 나는 낮아지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낫게” 여기기보다 남을 “낮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헷갈리면 완전히 거꾸로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자신을 내세우는 헛된 자랑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데 “각각”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자신을 낮추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높여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해서 갈라지고 다투고 원망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선되고, 내 욕심을 내세우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주장을 앞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내가 더 잘 알고, 내 말이 맞고, 내가 앞서고,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 됨이 깨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철부지 어린 아이들처럼 내 위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나치게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동시에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욕심을 내려놓고, 고개 숙여 땅에 떨어져있는 겸손을 짚어 드십시오. 그리고 그 겸손을 가슴으로 꼭 끌어안아 품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욕심이나 헛된 영광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겸손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 되기 위한 방법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합니다.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하나 됨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고 훈련함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쁨으로 봉사합니다.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힘들어 한다면 내 짐이 아니더라도 다가가서 함께 짐을 져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나만을 생각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섬김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겁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보면 신앙의 성숙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연약하고 어릴수록 자신 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성숙하면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배려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관심이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자라면서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만을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문제가 됩니다. 만약 교회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면 그 교회는 절대로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녀들이 서로 도와주는 것을 볼 때 어떠십니까? 커다란 기쁨이 있고 마음이 흐뭇해지지 않습니까? 큰 아이들이 보다 작은아이들을 돌보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이 서로 손잡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에 감동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먼저라고 싸우고 티격태격하면 어떻습니까? 차를 타고 가는데 뒤에 앉아서 계속 싸우는 겁니다. 그러면 차를 세우고 “너희들 다 내려!” 이러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서로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섬김의 마음으로 서로를 돌아보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앉아 계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같은 생각, 같은 사랑으로 한 마음을 품는다면,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섬긴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가 되어 더 멀리 더 힘차게 날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가 된다면, 혼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함께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제가 오늘 말씀에서 언급한 마음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첫째로, 한 마음을 품어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봅니다. 둘째로, 겸손의 마음을 품어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더 높이고 세워줍니다. 셋째로, 섬김의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며 함께 수고합니다. 여러분, 세 마음을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를 오늘 주제처럼, 하나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세 마음을 모아서 꼭꼭 눌러 담아 잘 반죽해서 빚으면 뭐가 될까요? 네 바로 예수의 마음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곧,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하나 됨을 지켜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산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가 되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그분의 본을 좇아서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거나,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마땅한 특권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졌던 그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특권을 스스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인파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최강대국 로마의 왕자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낮아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디까지 내려가셨는지 보십시오. 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분은 사람이 되셨고 그리고 그분은 죽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친히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섬기려 오셨고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가장 치욕적인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살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신 겁니다. 십자가를 선택하심으로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겁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천사들을 명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달리신 것은 가룟 유다가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 아니라, 빌라도가 사형판결을 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복음이 십자가 없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서로 반목하고 다툼과 갈등이 있고 갈라지는 겁니다. 교회 안에는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정작 세상 한가운데서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섬기고 따르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겁니다. 브라질에서 큰 종교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되고 판매되었습니다. 구경하던 한 선교사가 십자가 장식품을 파는 곳에서 이런 팻말을 봅니다. “값싼 십자가들” 그 팻말을 보며 선교사는 생각합니다. “값싼 십자가라! 이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찾는 십자가가 아닌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그렇지 않았는데……” 여러분의 십자가는 어떠합니까? 그 값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너무 쉽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이익만을 챙기려하고, 개인적인 일이 조금만 생겨도 주님을 섬기는 일을 확 줄이거나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작은 일에 쉽게 불평하거나, 별것 아닌 일에도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십자가는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에게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영원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내시려고, 영원한 죽음에서 나를 살리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을 따르면서 내가 회사를 위해 하는 것만큼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분을 따르면서 내가 내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만큼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마음의 눈을 열어서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가장 높으신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장 낮아지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높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적인 존재들이 그분에게 복종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들을 섬기며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낮아지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의 마음을, 그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나가 된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