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배자의 기다림
본문 : 시편 28편
설교자 : 최종혁

 

우리는 26편부터 계속해서 다윗의 시를 살펴보고 있는데, 각 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성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특별히 ‘예배자’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기도와 기다림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제가 어릴 때와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학생시절만 해도 누군가와 약속을 하려면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아야 했습니다.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 시간에 만났습니다. 시간이 되었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으면 기다려야 했습니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그제서야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시간이 되는지 확인하고 그날이 가까워 오면 자세한 약속을 잡습니다. 약속 시간에 그곳에서 갔는데 상대방이 오지 않으면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합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듣고 조금 더 기다릴 수도 있고 그냥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과거와 오늘날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예전에 비해 기다리는 과정이 빠졌습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확실히 적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 자리에서 해주시지 않고 기다리라고 약속하신 경우입니다. 노아는 비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렸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즉각 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지 못했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기는 나이가 들어가고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가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실제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죽음의 위험을 넘겨야 했습니다. 노아의 경우도 비가 금방 오지 않아도 방주를 만들어야 했고,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그 사실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사이에서는 기다림이 오래 되면 혹시 약속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게 됩니다. 약속을 한 사람이 약속을 잊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이 그저 약속만 던져놓은 것입니다. 혹은 마음이 변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능성 때문에 맘 편하게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약속 자체나 약속을 한 사람에 대해 이러한 질문을 던져봐야 할 시점이 옵니다. 그러다가 기다리기를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때 포기합니다. 혹은,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때 포기합니다.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해서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그 후에 얻게 될 것의 가치와 그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있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과 관련해서 생길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라도 하나님께 해당되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지킬 능력이 없거나,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하겠노라 하셨는데 마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시기와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곧 하나의 시험이 되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고 또한 자라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바로 이루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기다림의 시간을 주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27편의 끝에서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이어지는 28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중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기다림의 끝에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 기다리는 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도우심을 구하고 기다림을 끝났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축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 기다림 중의 간절함(1~2절)

다윗은 지금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를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특별히 다윗은 1~2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2절에서도 비슷한 말을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라고 반복하면서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에 대해 그가 의지하는 “반석”이라고 표현하면서 도우심을 구합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는 2절 끝에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일부러 귀를 막고 듣고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윗의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니 이제 그만하겠다고, 포기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간절한지 그의 표현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무덤 혹은 구덩이는 종종 ‘사망’과 같은 말로 사용이 되기도 하는데, 특히 아무 소망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비참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런 죽음을 언급하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면 자신이 그런 자들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잠잠하시면 자신의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반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진정을 담아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서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향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계신 곳을 바라보며 그 손을 높이 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여기서 “지성소”를 언급합니다. 앞선 시편들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여호와의 집, 성전, 초막 등으로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성소”라고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신 바로 그곳을 강조합니다.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기도를 처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구원을 구했지만 그에 대한 응답이 없자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귀로 듣지 못하는 것처럼 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마치 말을 못하시는 것처럼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니 지금 자기 상황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신을 섬기는 다른 악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를 구합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기도의 간절함은 줄어들 때가 많습니다. 점점 확신이 줄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다윗처럼 더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계속되는 과부의 간절한 기도에 그 원하는 바를 들어 주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훨씬 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고 싶어 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 방법도 기다림 중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2. 기다림 중의 간구(3~5절)

다음으로 실제로 다윗이 기다림 중에 간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구했을까요?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를 나타내시기를 원했습니다.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다윗은 악인과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라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끌어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나는 그렇게 하시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나는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4). 다윗이 구하는 것은 ‘공의’입니다. ‘사회 정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악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달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받을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에 대한 결과이자, 노력에 대한 보상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일, 노력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3). 이들이 한 일은 정직하지 않게 행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악을 품고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처럼 말하고 이웃을 위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악독입니다. 상대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궁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5).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일하신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이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 계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법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하는 잘못된 일에 대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행동을 달라지게 만듭니다. 어떤 일은 아예 하지 않고, 어떤 일은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혹은 다른 방법으로 합니다. 법과 심판에 대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인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하시는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악을 행하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5절). 마치 전쟁에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건설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전쟁에서 패한 반역자들을 끌고 가서 멸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기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조금 불편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익숙한 우리에게 다윗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악한 자들에게 심판이 이뤄지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가 아닙니다. 왕으로서 그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기에 더욱, 악한 자들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구합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뉴스를 통해 사회의 죄악을 보면서 해야 할 기도이고, 위정자들을 위해서 할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뤄지기를 하나님의 상식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구하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지도자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사실 시편을 보면 이런 내용의 기도가 많습니다. 세상의 죄악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도 그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그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도 그칠 수 없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비슷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그 기다림 중에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마치 불의한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간 여인처럼 말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그분이 행하시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5절에서 다윗의 기다림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다윗의 기도는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찬양과 또 다른 중보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3. 기다림 끝의 찬양(6~7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국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에 대해서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자주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어떤 어려움 중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도우셨을 때에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편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읽어가는데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잘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구할 때는 열심히 구하는데 응답하심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넘어가거나, 그냥 상황이 그렇게 잘 풀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 생각은 해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고침 받은 10명의 나병환자들과 같습니다. 다 똑같이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예배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감사한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 역시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돌아가서 그 감사를 표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고침을 받은 것 자체가 너무 놀랍고 그들에게 기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깨끗해짐을 인정받고 가족에게도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자주 그렇게 합니다. 마치 이것만 해주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처럼 기도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해주셨을 때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이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힘과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았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구하는 즉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나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그리고 꾸준히 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이제 얻을 것 얻었으니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마음은 이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악한 자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찬송하리로다”는 어떤 사실을 인정하다 혹은 고백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시편에서는 주로 “감사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받은 것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높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중에는 실패한 것 같고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그를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는 중에 기도하고 기다림의 끝에 찬양할 수 있게 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4. 기다림 끝의 중보(8~9절)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그들”은 9절에 나오는 “주의 백성”, “주의 산업”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나의 힘”이라고 고백 했었는데(7절)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의 힘이 되십니다. 특별히 다윗이 여기서 왕으로서 이런 기도를 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 뿐 아니라 모든 백성의 힘이 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구합니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주를 의지하는 모든 백성에게 그렇게 해달라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기를 구했지만, 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복, 인도하심이 있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왕으로서 바라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고 그분의 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우리도 이런 세상을 바란다면 계속해서 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생각을 좁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도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제일 중요하고 제일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다림이 끝날 때 우리는 이 사실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기다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체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복을 이웃들과 나눕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 수 있게 할까요? 이 힘든 기다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예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던지신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열쇠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신실하신 아버지께서 결코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과 같은 결과를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다리는 중에도 다른 이들과 같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맞습니다. 믿음 없는 자에게 마땅한 것이 나와는 관계없다고 말하려면 내가 믿음 있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정말 그런 자처럼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