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배자의 바라는 한 가지
본문 : 시편 27편 4절
설교자 : 최종혁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오늘은 매우 근본적인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교회에 왜 다니세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정말 편하게 쉬고 싶은 날 아침에 일어나게 하고, 일로 지쳐가는 수요일 저녁에 교회로 가게 합니까? 어떻게 다니다보니까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가족들이 다 나가니까 나오게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 가니까 사람들이 좋아서 교회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 친구 때문에 혹은 남자 친구 때문에, 어떤 비즈니스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는 그런 이유로 교회로 나간다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더라, 잘 믿으면 남편이 하는 사업도 잘 되고, 아이들도 공부 잘 해서 좋은 학교 가고 한다더라, 병도 나을 수 있다고 하더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그것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멸망에 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런 대답을 하실지 모릅니다. 이 대답에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믿는 자에 대한 성경의 여러 표현 중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롬 1:7),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어떠한 사랑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이것은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믿는 자입니다. 그럼, 앞서 했던 질문에서 ‘믿는다’는 말을 ‘사랑한다’로 바꿔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대답들이 좀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구속 받기 위해, 심판을 피하기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현재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런 대답은 좀 민망하지 않습니까?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나 부모님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내가 당신 정말 사랑해. 그거 알지? 내가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정말 사랑해. 그래야 저녁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진심이야.” 이상하십니까? 자녀가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아빠, 정말 사랑해요. 지금 힘드셔도 힘내세요. 제가 항상 응원할게요.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야 월급이 나오고 제가 좀 좋은 신발 신지 않겠어요?”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내라면 저녁밥을 해줄까요? 부모라면 정말 이 아이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 하겠습니까? 사랑한다고 했고 진심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랑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과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많은 결과들, 유익들은 참 귀하고 놀라운 것들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이 어떻게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죄와 싸워서 이기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놀랍고 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혹은 목적이라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내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대신해서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하나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그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다윗은 좋지 않은 상황 중에 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지금 두려운 상황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렸다고 할 수 있는 상황,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시편 27편입니다.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의 시를 이미 시편에서 많이 접했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다윗이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과정이고, 정말로 원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좀 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게 하게 쓴다면, “내가 바라는 것, 그 한 가지를 여호와께 구하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무언가를 바란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언가를 바란다, 원한다는 것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더 원하는 것, 혹은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일을 할 뿐입니다. 큰 그림에서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 내가 싫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일어나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직장인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일을 하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일이나 공부도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닌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그것으로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수많은 사람을 아침에 일어나게 하는 동력인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지만, 다이어트를 위해 먹지 않습니다. 평생 먹고 싶은 것만 먹던 사람도 건강의 문제가 생기면 좋은 것만 찾아 먹습니다. 맛이 없어도 그렇게 합니다. 당장의 식욕보다 건강을 더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하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최우선 순위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를 결정합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정말로 원하는 그 한 가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선택을 결정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 가장 중요한 한 가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말합니다. 단 한 가지입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원하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다윗이 원하는 것은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잠깐이 아니라 평생을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집은 화려하고 웅장한 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집”은 당시에 천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천막 생활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특이하게 매우 화려하고 좋은 그런 곳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곳이라면 한번쯤 방문해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평생을 그곳에 있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특별한 임재를 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여 매일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인 듯합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1]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았고 기쁜 중에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죄를 지었을 때도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가장 염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가 원하는 한 가지는 사람들의 좋은 평판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어쩌면 자신의 평판이 더욱 심각하게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문제가 생겼을 때 보여야 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나서,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제 화 풀어. 저녁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과가 아니라 저녁밥을 사랑하는 사람의 사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됐다면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다윗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죄가 그 부분에 있어 문제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너무나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다윗만 유별난 사람이었을까요? 그보다 더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버리더라도 사랑하는 주님께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주신 사명이 있고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다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두 사람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노아는 비를 본 적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비로 세상을 심판할 테니 방주를 지으라고 하니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고 분명히 알려주시지 않았음에도 가라고 했을 때 고향을 떠났습니다. 자식 하나 없던 그가 하나님께서 열국의 아버지로 삼겠다고 하셨을 때 그 말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큰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다니엘은 창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결정과 행동입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비상식적인 결정들을 했을까요? 이들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일들을 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달랐을까요? 무엇이 다른 사람들과 이 사람들을 구분 지었을까요?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달랐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단 하나의 마음, 나뉘지 않은 마음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하나님만을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달랐습니다.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바라본다는 것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그림을 보거나 웅장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보이는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놀라움으로 바라봅니다. 너무 놀랍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우리는 잠깐 동안 할 말을 못 찾기도 하지만, 이내 어떤 식으로든 그 대상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사모한다는 말은 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기본적인 의미는 ‘무언가를 점검하다, 시험하다’는 의미입니다. 시험하기 위해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문을 던지고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사모하다”, “간구하다”, “묵상하다”, “여쭙다”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놀라워하며 바라보고 칭송하는 것이 언급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계속해서 ‘묵상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듯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묵상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것, 예배하는 것을 다윗은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표현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아마 자연 풍경이나 예술 작품에 대해서 가장 많이 쓸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아름답다는 말을 합니다. 외모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내면에 대해서도 아름답다고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모습에 대해서 “마음이 참 예쁘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아름다움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실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이라고도 하고 ‘영광’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다윗은 아름다움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과 정확히 같은 표현이 시편 90편 17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7). 여기서는 많은 번역본이 은총 혹은 은혜로 번역을 했습니다. 모세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베풀어진 호의가 바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13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선하심”과도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쩌면 이방인들이 우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두고 그것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의 아름다움은 겨우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움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행하신 놀라운 일들입니다. 그 일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아름다움을 선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순서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 때문에, 혹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아름다운 일들은 우리로 그러한 일들을 하신 하나님을 더욱 생각하게 하고 더욱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의 어떠하심, 그 분이 하시는 일,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하시는 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때로 그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행동들을 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약속을 지켜 가셨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능력을 그들에게 행하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쏟아 냈습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차라리 애굽이 더 좋았다,라고 불평했으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물을 내시고 그들을 만나로 먹이고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그들의 신발이 닳지 않았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작은 백성들을 돌보신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절정은 바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체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자를 돌보는 것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황이 자기를 낮춰서 어린 아이를 안아주고 하는 모습에서 감동하는 것이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나라의 왕도 아니고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을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셨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들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분이 하시는 일들의 아름다움입니다.

다윗은 아마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계시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그리고 경험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윗이 오직 그 하나님만을 바라고 사랑하게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절정을 경험한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믿음의 선진들이 오늘날 살고 있어서 그들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갑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내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제가 원하는 한 가지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을까요?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만약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 때문이라면,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배자가 정말로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 한 분이셔야 합니다. 주일에 나를 일어나게 하는 힘, 수요일에 나를 교회로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안 그래도 바쁜데,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아서 하고, 교회에 어떤 일이 있을 때 봉사하는 이유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좀 억울한 일이 있지만 참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정직하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의 원동력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일 때에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우리 마음의 동기가 바뀐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가 바뀐 것입니다. 구원 받지 않은 사람도 교회 잘 나오고 헌금 잘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할 수 있고, 억울한 일 참기도 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을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아닌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우리의 기쁨을 찾았고 만족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을 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을 때 우리 마음의 소원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찾습니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팥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꾼 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마치 100만원을 두고 사탕 하나를 선택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얼마나 가치 있는 분이신지 알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계속해서 말씀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삶 속에서 그분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알면 알수록 실망하게 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 온전히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원래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가고, 무엇이 여러분이 어떤 것을 선택하게 합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