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이여, 떨치고 일어나소서 Part II
본문: 시편 35편
설교자: 최종혁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저주의 시편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이기적인 방법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즉, 개인의 복수심 때문에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어떻게든 원수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런 불의를 바로 잡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 받기 원하는 기도가 저주의 시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기도가 아니라 좀 더 공적인 차원에서의 기도입니다.

 

시편 35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전장(1~10절), 법정(11~18절), 호소(19~28절)). 각 부분에서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실 것을 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와 자신의 원수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를 알립니다. 그러면서 왜 그런 기도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끝에서는 항상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찬양 받으실 것이 대해서 언급합니다.

 

전장(1~10절)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1절)

가장 먼저 나오는 다윗의 이 호소는 법정과 전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투시고”라는 표현은 재판에서 논쟁하는 것을 말하고, “싸우소서”는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두 배경의 공통점은 우리편과 상대편,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그 두 편이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편에 서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만, 여기서는 요청이나 부탁보다 오히려 명령에 가까운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다윗이 하나님께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심정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막무가내로 무조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 나오지만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고 까닭 없는 고난 중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해서 이런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2~3절)

먼저 다윗은 전장을 배경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시적인 표현으로서 전쟁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지만, 다윗은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전쟁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긴급한 상황인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다윗의 묘사에서 하나님은 전쟁에 뛰어난 용사로서 완전한 방어를 위해 방패와 손 방패를 잡고 계시고, 공격을 위해서는 창을 들고 계십니다.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방패를 들고 일어나시고 창을 빼시라고 청합니다. 마치 왕을 보호하며 왕의 길을 열어주는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그렇게 싸워 달라고 구합니다. 또한 그 속에서 확신을 원합니다.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내가 너의 구원이다’라는 말, 어쩌면 지금 다윗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 이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 되신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말 한마디는 그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위로와 확신을 구합니다.

이제 다윗은 구체적으로 그의 적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는지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앞서서 다윗의 적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들”,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4)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한 그들은 계획을 세워 교묘하게 다윗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함정을 팠사오니”(7). 그들은 까닭 없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이”(7)

이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다윗이 법정을 배경으로 말할 때 더욱 자세하게 말합니다. 여기서는 전쟁이 배경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보다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더 강조됩니다. 그래서 4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다윗은 그의 대적들에게 부끄러운 패배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4절)

4개의 강력한 청원입니다. “부끄럽게 하소서”,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물러나게 하소서”,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결국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도망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5~6절)

그들의 패배에 대해서 좀 더 시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겨는 알맹이와 대조되어서 ‘쓸모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 앞에 날려 버려지는 쓸모 없는 겨와 같이 원수들이 그런 종말을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악인의 길에 대해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심판의 모습을 다윗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원수들이 패하여 도망할 때에 잘 도망가지 못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도망해서 합당한 심판을 다 받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여호와의 천사”가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천사”(5, 6절)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보내신 천사 혹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누가 되었든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혹은 천사를 통해 사람들의 일에 개입하십니다. 34편에서도 다윗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34:7)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다윗은 여호수아가 만났던 여호와의 군대 장관과 같은 존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하심으로 지금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다윗은 구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런 일을 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사사로운 복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7절에서는 분명히 원수들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7절)

다윗의 원수들은 이유 없이 혹은 잘못된 이유를 가지고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했습니다.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다윗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과 어떤 식으로든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알면서 거짓 증언을 하고, 살인하려고 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8절)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보응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있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다윗 자신은 그로 인해 구원을 얻고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9절)

이 시편의 각 기도의 끝은 모두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다윗이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공의를 구하는 기도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일을 바로 잡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 연약한 자가 불의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것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10절)

“내 모든 뼈”는 다윗이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9절에서는 “내 영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하나님처럼 이렇게 공의를 행하는 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합니다. 공의를 원하지만 공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이 공의인지 아시고 그렇게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드러나시기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목적이고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때도 동일한 목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법정(11~18절)

두번째로 다윗은 법정을 배경으로 삼아 자신의 현재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갑니다. 앞의 전쟁도 단지 시적인 장치가 아니었던 것처럼 법정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법정에 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상이라는 법정에서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고 모함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두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11절)

마치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을 심문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세운 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윗을 공격하는 자들은 불의한 증인들이었고 다윗은 알지도 못하는 일을 가지고 그를 모함했습니다.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12절)

그들이 하는 일은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다윗을 괴롭게 하고 모든 것을 잃은 듯이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윗은 그 대적들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13절)

다윗은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굵은 베 옷을 입고 금식하며 자신을 괴롭게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이렇게까지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을 위해서 금식하고 슬퍼하며 기도했습니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아마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을 때, 즉 그의 대적들에게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기뻐했을까요?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14절)

다윗은 친구나 형제, 심지어 어머니를 위해서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난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그들을 위해 함께 슬퍼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그들을 위해서 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15~16절)

다윗이 그들에게 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다윗이 넘어졌을 때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혼자 기뻐하기 아쉬우니 서로 모였습니다. 다윗의 상황을 안주거리로 삼아 그들은 즐거워하며 다윗을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다윗을 더 넘어뜨리고 아주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지 서로 의견을 나눴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신에 대한 변호입니다. 다윗은 분명 최선을 다해 선을 행했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17절)

다윗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하나님 제가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이렇게 선을 행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악한 말 뿐이고, 내가 안되는 것을 바라고 그것을 기뻐하는 자들 뿐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이제는 이 상황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18절)

그리고 그 끝은 다시 한번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모여서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잡히고 나면 다윗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호소(19~28절)

이 시편의 나머지는 다시 한 번 다윗이 하나님께 강하게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19절)

원수 될 이유가 없고,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그들은 서로 눈짓하며 교활한 계획을 세우고 다윗의 넘어짐으로 기뻐하려고 합니다. 그런 일을 막아 달라고 다윗은 구합니다.

“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20절)

그들은 또한 화평을 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화평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평화를 추구하는 자를 파멸로 몰아 넣는 말을 합니다.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21절)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 증언입니다. 11절에서처럼 이들은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보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다툼을 일으키고 한 사람을 넘어 뜨리려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원수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다윗이 확신을 가지고 구할 수 있는 이유는 “주께서 이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들이 말하는 거짓을 아십니다.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거짓 증언 한다는 것도 아십니다. 반대로 다윗이 어떻게 그들의 악에 대해서 선으로 행했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윗은 담대하게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22~24절)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공의로 판단 하시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증거나 증인이 충분한지 아닌지도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기까지도 면밀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이것을 다윗이 의심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하나님이 ‘움직이시느냐’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떨치고 일어나셔서 지금 내 문제에 개입하시느냐는 것이 그에게 중요했고,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나타날 결과는 분명합니다. 악인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의인은 기뻐할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으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낭패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25~26절)

반대로 의인들은 이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항상 말하던 자들입니다. 평안함 중에서도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드러내실 때 그들은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꼭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7~28절)

사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불의한 분이 되거나 무능한 분이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적들, 여기 다윗의 원수들은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공의롭고 능력 있는 분으로서 드러나시길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은 바라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을 높이고 기뻐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다윗의 기도입니다.

 

도전

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지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누군가의 멸망이나 심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당했던 시대라면,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은 일본의 멸망도 포함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베푸는 사회, 없는 자들이 긍휼을 얻는 사회, 악한 자들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고 선한 자들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공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임 받으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그래야 하듯이, 우리가 하는 기도의 목적도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일지라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셋째로, 좀 더 우리 생활과 관련되어서 적용할 부분도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서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의 구분입니다. 선과 악이 분명한 상태에서 다윗은 선을 행하고 있었고 그의 원수들은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다윗은 고난을 받고 있었고 악을 행하는 그의 원수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그가 그런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까지 할 때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 주시기를 바란 기도입니다.

이런 다윗의 기도가 우리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선을 위해서 열심을 내며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기 보다, 적당히 악과 타협하며 사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면, 악을 향한 이런 심판의 기도는 실제로 우리와는 거리가 먼 기도일 것입니다. 저주의 시편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더욱 선을 위해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 중에 인내하며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하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