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뉴스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품행이 바르지 못한 아이를 죽이고 토막낸 부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11세 소녀가 가정의 학대와 폭력을 피해 한 겨울에 여름 옷을 입고 2층에서 배관을 타고 맨발로 탈출한 사건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동시에 뉴스에서는 빗자루로 기간제교사를 폭행하고 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은 학생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생들에게 성추행을 당하고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여교사들의 기사도 함께 나왔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뉴스를 접하면서 ‘과연 아이를 학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방치하지 않는 교육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내 아이를 저 가여운 어린 아이들처럼 학대의 피해자로 전락시키지 않고 싶습니다.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아이가 교사를 폭행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약하고 어린 여성을 성추행하는 자녀로 자라는 것은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자녀로 키우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부모의 권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권위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이 것을 가르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0-21)

자녀는 부모를 떠나 다른 독립된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 부모의 권위 아래 보호를 받고 공급을 받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정에서 맡겨진 역할에 따라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엡 6:4). 남편은 가정의 머리로서 인도자(엡 5:23), 보호자(엡 5:28), 공급자(창 3:17)가 되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의 돕는 배필로서(창 2:18) 남편을 존경하고(엡 5:33) 사랑하며 순종해야 합니다(엡 5:22-24). 두 사람이 한 팀으로서 성경의 원리에 따라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할 때 아름답고 질서있는 가정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엡5:22-33).

성경적인 가정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질서입니다. 권위가 그 질서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한 몸으로 이루어진 아내에게도 질서 상 머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은 여러 번 반복하여 명령합니다(엡 5:22, 24; 골 3:18; 디도서 2:5; 벧전 3:1). 그리고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자녀들에게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참고: 엡 6:1).

권위주의에 크게 고통 받은 적이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권위” 혹은 “질서”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테드 트립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권위 아래 살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권위이시고, 가정, 교회, 정부, 기업 등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의 사람들에게 권위를 주셨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 권위를 갖는 것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마음을 다루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17p)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친밀하고, 아이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며, 어떤 것을 요구했을 때 그 진실성을 전혀 의심할 필요 없이 아이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부모일 것입니다. 그 부모의 말에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무섭게 성장하는 이기심과 교만에 제동을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는 마땅히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아이를 지도해야 합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되서가 아닙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할까봐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는 가장 이타적이고 친절하며 온유한 권위입니다. 테드 트립은 “참으로 친절하고 이타적인 권위에 대해 아이들은 대부분 저항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18p).

아이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아이가 그 맛있는 초콜렛을 왜 많이 먹으면 안 되는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공공장소’라는 이유로 넓은 공간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소리지르면 안 되는 이유를 어떻게 다 이해하겠습니까? 하지만 때로는 다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자유롭게 사는 자기 절제를 가진 사람이 되도록 그들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7p).

어린 시절 가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잘되기를 항상 바라는 부모의 이타적인 권위에 순종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 하나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고 그분을 주로 모신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구원 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부모는 아이에게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구약성경은 아주 무서운 경고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권면합니다(잠 30:17). 너무 무서운 말씀 아닙니까? 소름끼치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극단적이고 무서운 저주보다 더 무서운 저주는 하나님의 권위를 끝내 무시할 때 맞이할 영원한 멸망입니다. 부모로서 아이의 영혼을 이 무서운 저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는 아이를 권위에 순종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로 따라나오는 말씀은 “권위”가 “권위주의”가 되는 것을 막습니다. 권위를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권위를 내세우는 것의 문제입니다. 저는 앞서 권위를 설명하면서 이타적이고 친절하며 온유한 권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권위가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정의 권위를 갖는 아버지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아이를 화나게 하지 말라?’ ‘권위를 갖고 아이에게 순종하라고 온유하게 권면하지만 아이가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조금은 혼동이 될 것 같습니다. 존 맥아더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시대에 이방 세계와 많은 유대인 가문에서도 대부분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군림하는 권위로 가족을 다스렸다. 그 시대에는 아내 그리고 자녀의 욕구와 안녕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사도는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자녀에 대해 가지는 권위에서 자녀를 분노, 절망, 원망으로 내몰 수 있는 불합리한 요구와 엄격함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맥아더성경주석, 1404)

바울은 감옥에서 함께 쓴 다른 편지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 뒤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가 화내거나 짜증낼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의 상태를 봐가며 권위를 숨기고 있다가 상태가 좋을 때 권위를 보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아이가 납득할 때까지는 권위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권위주의를 피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의 욕구나 그들의 안녕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대로 무조건 해!’라고 요구하는 것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죄의 형벌인 지옥에 대해 많이 가르치셨던 분이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훈계하셨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동시에 죄인의 필요를 돌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동정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엄격하시며 거룩하신 분이셨지만, 누구보다도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부모보다, 자녀보다,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권위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셨지만,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 먼저 내어주신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부모의 권위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자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들의 필요를 돌보고 요구에 귀 기울이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길로 권위를 사용하여 인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유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인데, “주의 교훈과 훈계”가 바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똑바른 길, 자녀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모가 성경을 잘 모르고,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때, 올바른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제시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인지 알지 못할 때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그들에게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에게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명하신 것은 너무나도 마땅하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할 것이며,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전해 듣는 말씀으로 올바른 교훈과 훈계 속에서 양육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의 권위 아래 순종하는 백성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아이들을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보조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매일 한 알의 비타민을 먹는다고 세 끼의 식사를 먹지 않아도 되는 아이가 있을까요? 보조교육이 본교육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일학교의 비중이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며 아이들에게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양육하고 지도할 책임은 어디까지나 부모에게 있습니다. 아이를 가장 많이 아끼고 사랑해야할 책임도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아이에게 권위에 순종하도록 가르칠 사람도 부모입니다. 그 아이의 필요와 욕구를 돌아볼 사람도 부모입니다. 날마다 자녀에게 성경을 먹이고 성경을 가르쳐야 할 사람도 부모입니다.

학대와 방치 사이에서 고민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 둘의 극단으로 빠지지 않는 사랑과 순종의 길을 보여줍니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순종을 가르치십시오. 성경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며 여러분의 진정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