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성경해석 예제는 지난 주에 이어 로마서 7장 18-25절입니다. 18-20절은 지난주의 내용을 거의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고, 21-25절이 오늘 성경해석의 핵심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성경해석 과정을 통하여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함께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인과 죄”라는 주제로 이 본문을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볼까요!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지난 주에 다룬 내용과 아주 유사한 내용입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표현은 17절의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를 반복한 것 같습니다. 같은 결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죠. 바울은 18절의 시작을 “for”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면서 14-17절의 내용보다 더 강도 높게 자신의 속에 존재하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관찰을 해보겠습니다.
1. 주어는 “나”입니다. 18절~20절까지 계속해서 “내 속,” “내게,” “내가”가 반복되어 사용됩니다. 저자인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동사 역시 지난번 본문에 이어 현재형입니다. “거하다”(18), “있으나”(18), “행하는”(18), “원하는”(19), “행하다”(19), “원하다”(20), “하면”(20), “거하다”(20). 모두 다 현재형입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아노니”만 완료형입니다. 현재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동사의 시제를 알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하는 시점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구원받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3. 반복되는 단어나 표현을 살펴봅시다. “거하다”가 반복되고 “원하다”가 반복됩니다. “행하다”도 반복됩니다. “선”과 “악”도 대조되며 “있다”와 “없다,” “아니다”와 “~이다”도 대조되어 사용됩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무언가가 거하고 있으며 그것이 선과 악의 대조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18절은 “for”로 시작을 합니다. 저번주에 살펴본 내용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제시합니다. 사도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한 것”은 그동안 강조해온 “율법”의 특성(“선한 것”)과 유사합니다(14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삶’ 그것이 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5.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바울에게 선한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없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원함은 내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속에 선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래서 다시한번 “for”라고 시작하며 설명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볼까요?

흠정역: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새번역: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번역을 참고하면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했는데 이는 선을 행하고 싶은 의지 혹은 욕구가 있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한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도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재 상태에 대해 바울이 내린 결론은 17절과 유사합니다.

6. “만일”이라는 조건문은 이미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바울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입니다(“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7. 그래서 결론은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입니다. 17절과 동일한 결론입니다. 바울은 이원론적 관점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속에 죄의 욕망에 따라 내가 악을 행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14절).

8. 존맥아더 성경주석에는 “육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육신은 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활동 본부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죄에 종속되어 철저하게 오염되었다(1262p)

 

자 이제 오늘의 핵심 구절로 들어가봅시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 먼저 “그러므로”가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의 최종 결론을 향하고 있다는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2. 등장하는 동사들은 전부 현재형입니다. 단 하나, “누가 나를 건져내랴”(set me free)부분만 미래형인데 어떤 기대나 소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현재 자신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바울이 깨달았던 “법”(하나님의 법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의 변하지 않는 원리-“principle”(NASB))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17절과 20절에서 살펴본 결론 부분과 동일합니다. 진정으로 선을 행하려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습니다. ESV영어성경은 아주 흥미롭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So I find it to be a law that when I want to do right, evil lies close at hand.” 자신이 선을 행하기 원할때 악이 자신의 바로 곁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4. 22절에서 “for”라는 접속사를 시작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속 사람”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찾아보니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에베소서 3장 16절에도 나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5. 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존재입니다. 맥아더성경주석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의 새로운 내적 자아는 더 이상 죄의 편을 들지 않고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법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한다(시 1:2; 119:14, 47, 77, 105, 140).

일단 여기까지만 들어가고 23절로 넘어가봅시다.

6. 23절에서는 “내”(바울)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의 법”은 25절을 참고하여 생각해볼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소욕, 열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섬기노라”

7. 그런데 바울의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법”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자신의 마음과 싸웁니다. 먼저, “내 지체속”이라고 말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외부 환경에서 죄의 근원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8. “한 다른 법”이 하는 일은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일입니다. “한 다른 법”이 싸워 얻으려고 하는 것 혹은 싸움의 목적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14절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고백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려는 마음과 죄의 법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9. 우리가 많이 들어본 사도 바울의 탄식이 24절에 등장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새번역 성경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라고 번역하여 그 의미가 더 잘 전달됩니다. 내적 전쟁이 날마다 일어나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 비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맥아더성경주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좌절과 비탄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죄에 대해 통곡한다. 신자가 자신의 죄성을 깨닫는 정도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 법의 완전함을 분명하게 깨닫는 정도에 정비례한다(1262)

10. “사망의 몸”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있습니다. 맥아더 성경주석에 나오는 것인데요.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다소 근처에 살았던 한 부족은 피살자의 시체를 살인자와 함께 묶어 시체의 부패가 서서히 살인자를 감염시키게 하는 방법으로 살인자를 처형했다고 한다.” 바울이 묘사하는 “사망의 몸”은 살아있는 지체(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지체)와 죽은 지체(죄의 법을 사랑하는 지체)가 함께 공존하는 몸이었습니다. 그 결국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1. 만일 7장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면 거듭난 신자가 거듭나지 아니한 불신자와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 의문이 생길것입니다. 똑같이 죄로 인해 죽는다면 말입니다. 한 사람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런 마음이 없다는 차이만 존재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는 속사람이 존재하고, 불신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는 운명입니다(롬 8:7). 그러나 둘 다 사망의 몸을 가지고 사망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12. 25절은 7장에서 계속해서 묘사된 암울한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언급하며 그것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8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더 자세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칠흙같은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8장에서는 그 빛의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13. 바울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감사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감사의 제목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감사의 제목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제목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4. 25절 안에서는 우리가 “감사의 제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망의 몸”이 결국 이루고자 하는 것, 바울이 탄식하며 괴로워하는 것의 궁극적인 결론에서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8장으로 넘어가면 그것이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셨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8:2). 일단 7장에서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사태를 해결하셨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15. 25절의 마지막 문장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입니다. 이 문장은 아주 명료합니다. 그동안 설명해왔던 내용의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 속에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기 원하는 소욕이 있고(속사람), 그리고 죄의 법을 순종하기 원하는 소욕이 존재합니다(육신).

한 가지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속사람”과 “육신”의 구분입니다. “속사람”은 우리의 마음, 정신을 의미할까요? 그렇다면 “육신”은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마음, 정신을 반으로 나눠 거듭난 영역과 그렇지 못한 육신의 영역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요? 성화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우리 몸을 문자 그대로 때려서 정신에 굴복시키려고 노력하게 만들지 모릅니다. 혹은 우리 생각과 정신을 스스로 분석하면서 어떤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고 어떤 생각은 영의 생각이라고 잘못 분별해낼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8장에서 더 깊이 다루게 될 것입니다.

3

일단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우리 지체 안에 두 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법과 죄를 따르려는 법입니다. 두 소욕, 두 욕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입니다. 그 상황 때문에 바울은 탄식하고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감사했을까요? 로마서 3장 10-18절은 죄인의 상태에 대해 묘사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모든 죄인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살펴본 내용으로는 신자가 율법과 죽음으로 갈라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갔을 때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따라 살기 원하는 마음이 신자 안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7장 마지막 부분에 바울이 탄식한 것은 동시에 그에게 죄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찬양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율법”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로 인해 8장 1절의 말처럼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4

오늘 성경해석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당신이 신자라면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의 풍성한 신성과 아름다운 성품에 압도되어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 지체 속에서 악을 사랑하고 죄를 기뻐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로 인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지 아니하던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방종으로 향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죄에 탄식하면 할 수록 나는 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붙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는 다시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이끌고 가기 위해 나의 속사람과 싸우는 죄의 욕구와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 영혼을 죽이는 말>에서 폴 트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해서 죄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오묘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분은 우리 속에서 자신의 일하심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얽매인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예수님의 죽음의 대가로 자유를 깨닫는다(87p)

<성화의 은혜>를 쓴 브라이언 채플도 이와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시험을 피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하나님을 엄한 얼굴을 한 독재자로 생각하거나 그분을 대할 때 오직 죄책감과 좌절만을 느낀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있을 수 없다.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결국 영적 능력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책감과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로 그분의 용서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진다…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 주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시험의 권세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구세주는 우리를 영원히 그분의 사랑으로 보호하신다. 구세주의 품 안에 안겨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진다(189p).

찬송가 “나의 죄를 씻기는(What can wash away my sin)”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분으로 인해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시간에는 그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