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칭찬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거나 혹은 중심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 입으로만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면 좋아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칭찬이기 보다 오히려 모욕이며, 기쁨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사람의 중심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첨이나 가식적인 예배는 절대로 그분께 기쁨을 드릴 수 없습니다. 스프로울의 말처럼 “예배에는 항상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R. C. 스프롤은 그의 책 “성경적 예배: 하나님이 계획하신 예배의 기본 원리 바로 알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지기라도 하신 듯한 태도로 교회에 나오거나 성찬식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고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긍휼로 우리를 대하며 온갖 좋은 선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42p)
어떻게 하면 더 진심이 담긴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면서 사람들은 예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짧고 명료하게 하면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구절을 다 찾지 말고 찾은 것을 읽어주면 더 좋다.’ ‘찬양 시간을 앞에 두고 먼저 마음을 준비시켜주는 것이 좋다.’
또 어떤 사람은 “형식이 없는” 예배가 자유롭게 성령에 이끌려 예배할 수 있게 하는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은 동일하게 질서에 따라 분명하게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예식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적으로 형식을 세세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출애굽기 25장이후). 신약은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들을 통해 질서에 따른 예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 또한 사실상 형식이 전혀 없는 예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식에 변화를 주려는 노력들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형식에만 집중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중심의 문제를 다루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프로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형식을 갖춘 예배를 원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예전을 갖춰야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성경적이냐, 또 예전을 사용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느냐가 문제이다. 예전이 평범하고 단순하든, 섬세하고 복잡하든 상관이 없다. 그 형식은 어떠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예전이 형식과 외형에 치우치면 예배가 부패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싫어하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형식을 갖추려면, 형식주의나 외형주의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20p)
제가 생각할 때 형식주의나 외형주의에 치우친 예배, 한 마디로 “텅 빈” 예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가 하고 있는 형식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본질을 담고 있는 형식 역시 성경의 원리에 따라 빚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합니다만, 우리가 하는 형식만이 성경적이고 다른 형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형식주의와 외형주의에 들어와 있다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준에서 예수님은 형식을 무너뜨리는 존재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이나 장로들의 유전등을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행위가 옳다고 여겨져도 자신들의 형식과 규례에 어긋나면 그것으로 판단거리를 삼았습니다. 때로 자신의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예배 형식만 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교회의 예식은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와 같은 문제를 발견합니다. 왜 우리와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형식이 담아내려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형식주의와 외형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2. 지루하게 느껴진다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식탁에 앉아서 아내에게 똑같은 문장과 똑같은 어투로 “나는 당신을 사랑해.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니 너무 고마워”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이런 고백을 한 번도 받아본적이 없는 아내라면 처음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똑같은 문장을 읽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몇 주 안가서 “여보, 당신 정말 진심으로 하는거에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그 고백을 듣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고백인데도 건성으로 듣게 되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예배를 건성으로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문제는 드리는 우리에게 있는 지루함으로 제한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외형적으로 치중되면 우리는 지루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정말 기쁜 것은 선물을 준 사람의 진심이 담겨있을 때입니다. 그 진심은 절대로 지루하지 않습니다. 선물하기까지 받는 사람을 떠올리며 생각하고 고마워하면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심이 강렬하면 강렬할 수록 선물의 값어치와 큰 관계없이 선물은 가치있습니다. 예배가 지루한 것은 그 진심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준비와 묵상,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3.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회중예배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우리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한 교회입니다. 우리의 신랑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힘입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 성도의 기도는 곧 나의 기도이며, 한 성도의 찬양은 곧 나의 찬양입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각 지체를 이루는 모든 성도에게 임하는 영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가끔 “한솥밥 먹은 사이”라는 말을 씁니다. 함께 같은 것을 먹고 자란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같은 것을 경험하고 같은 것을 나눈 사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가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를 대하는 사이”입니다. “한 진리의 말씀”을 먹으며 “한 주”를 찬양하고 “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이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외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 중 하나는 성도의 기도에 감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찬양에 흥미가 없습니다. 함께 듣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의무적입니다. 모두가 한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사랑의 예배를 나누고 있을때 혼자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교제는 나중에 따로 스스로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예배는 텅 빈 예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판단하기 바쁩니다. ‘저 사람은 왜 이런 찬송을 택했지? 6절까지 있잖아!’ ‘저 사람은 왜 이런 구절을 펴서 읽었지?’ ‘왜 기도할때 저런 말을 하지?’ ‘말씀해석이 왜 저래?’ ‘찬양 선곡이 왜 이렇지?’ 물론 우리는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 시간 내내 판단하기 바쁘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잘못된 해석이나 기도문에 대해 나중에 권면할 필요가 있지만 예배는 그것을 골라내기 위한 자리는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진심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하는 것이 공감하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형식주의와 외형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스프로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생명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나라를 구하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삼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저 재미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교회 활동을 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원하신다……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감당하신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다”(62-63pp).
참된 예배는 진심이 담긴 예배입니다. 담고 있는 형식이 어떻든 간에 담겨있는 진심이 참되지 않으면 참된 예배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진심을 잘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합리적이고 질서있는(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품위있는”) 예배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상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썩은 포도를 원료로 사용하면 썩은 포도주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참된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6-17).
제사라는 형식이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었습니다. 형식만 남은 제사가 불필요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심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상한 마음입니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갈구하는 회개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진심은 주일 아침 급하게 집을 나와 예배 시간 중간에 도착하여 겨우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준비되기 어렵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나를 위해 큰 희생을 하여 내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익을 끼친 은인을 만나면서 30분 늦게 약속 장소에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다가 갑자기 주일 아침 1시간동안 집중하여 묵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묵상하며 그분께 우리의 삶을 드리지 않으면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경배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진심으로 우러나오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프로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은혜와 사랑이 넘치고 신실했던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좇았던 이스라엘에게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매순간 여호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분을 내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지 말고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서 풍성하게 맛본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한다면, 넘어지고 실패한 죄에 대해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온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매일의 삶의 예배에 진심이 들어있다면 주일에 함께 드리는 예배 역시 진심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성경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고, 소그룹에서 공부해야 하며, 주일 예배에서 자세히 풀이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에 이르는 성장은 성경에 대해 배우고 성경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102-103pp)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말씀을 조명하실 때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삶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때 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으신 만물과 선지자들의 예언, 그리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에서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뒤이어 자녀에게 부지런히 이것을 가르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 깊게 만듭니다.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경험하게 합니다. 참된 예배는 말씀을 토양으로 삼아 우리의 삶 속에서 성장해나갑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늘 말씀이라는 양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먹여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신령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양 가사를 기억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우리 삶에 주님보다 더 귀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 우상들을 몰아내고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보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 예수를 사랑합시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이 유혹해도 핍박이 몰려와도 주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도록 예수를 사랑합시다.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심으로 나의 삶과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주신 그분께 우리의 사랑을 담아 예배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