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외로워요”
“제 이야기를 할 곳이 없어서 슬퍼요”
교회 안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 수많은 성도 안에 있지만 신자는 때로 이러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 즉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집’,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생각해볼 때 교회는 ‘외로움’과 거리가 멀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만나서 밝게 인사하고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내면의 외로움을 감추고 교회에 나왔다가 다시 그 외로움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삶의 짐들을 짊어지고 있지만 누구에게 그것을 나누기도 힘들고 선뜻 그것을 함께 지려고 하는 사람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점점 외로움에 빠져갑니다.
과거보다 이 문제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나마 사회 전반적으로 다들 힘들었기에 가지고 있었던 정 문화가 배가 불러가면서 점점 메말라갑니다. 콩 한쪽도 나눠먹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한 말세의 특징들이 더 드러나면서 사회 자체가 점점 메말라갑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고 비방하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고 절제하지 않습니다(딤후 3:1-4). 점점 더 고통스러움을 맛보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교회도 그 지대한 영향 아래 놓여있습니다. 개개인이 싸우고 있는 영적전쟁이 더 치열해지고 그 싸움에서 패배를 맛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른 성도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열두 사도를 부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밤이 새도록 간구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고 열두 명의 사도들을 선출하셨습니다(눅 6:12-19). 저는 한 번 상상해보았습니다. 모든 위로와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제권에 함께 하셨을 때 그들은 그 어떤 외로움도 느낄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들은 성자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정말 그 자리에 제가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그러나 저는 제가 곧 그 영광을 누릴 것을 알기에 그날이 더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에게 그들의 교제권의 중심이 되셨던 분을 떠나보낼 슬픈 순간이 찾아옵니다. 외로움이 밀려 들어옵니다. 슬픔에 잠긴 그들에게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길이요, 이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21).
아하! 그렇군요. 아버지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강력하게 체험하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새 계명”을 충성스럽게 지켜야 합니다. 그 계명이 무엇인지 교회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요 15:12). 이것이 바로 교회가 겪는 음침한 골짜기 같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신약성경에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50번 이상 등장합니다). 서로 열심히 사랑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13)
요한은 사도들 중 홀로 남아 마지막까지 이 진리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가 기억하고 그가 전해준 내용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한일서 3:11)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관계속에, 외로움 가득한 관계속에 거하신다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열매 맺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한일서 4:12)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 베드로 네가 대표니까 이제부터 니가 나머지 사도들을 사랑해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너희는 내가 이 열두 명 가운데서도 특별히 세운 자들이니 너희가 나머지 제자들을 더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라”는 동일한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로마서 12:10)
물론 인도자들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돌봐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인도자와 성도 사이에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인도자는 이 명령에 있어서 본이 되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동일한 명령 “서로 사랑하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뤄집니다. 그리고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던 외로움을 몰아낼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이 명령에 충성을 다했는지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있었습니다(행 2:44). 그들은 자기 소유를 팔아 필요한 것이 있는 성도에게 나눠주었습니다(2:45). 그들은 날마다 만났습니다(2:46). 그들은 배우기 위해 성전에 모였습니다(2:46). 그들은 집집마다 모여 함께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식사했습니다(2:46). 또한 그들은 함께 만찬을 기념했습니다(2:46). 그들은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매일 만날 수록, 매일 말씀을 대할수록, 날마다 기쁨으로 함께 식사할 수록, 날마다 만찬을 떼며 그리스도를 기념할 수록,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그들에게 충만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로움이 깊이 뿌리내릴 틈이 없었습니다. 혹 생기더라도 넘치는 교제와 사랑과 말씀과 권면, 찬미와 예배가 그것을 몰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갈수록 바쁜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사랑의 교제를 위협합니다. 과거 수요일과 주일에 모이는 성도의 수가 거의 비슷한 교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현실적으로 수요일 모임이 죽어가는 교회가 허다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결국 집회 자체를 폐지하기 이릅니다. 주일에도 공식 예배 시간에만 참석했다가 애찬 후 바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공식적인 모임이 위기를 맞이한다는 것은 사적인 성도간의 관계는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증거입니다. 친인척 관계인 사람들이나 오랜 신앙을 나눈 한 동네 사람, 친구, 또래가 아니면 한 성도로 한 교회에 있지만 모르는 사람과 진배없습니다. 거의 반평생을 같은 교회에 있어도 함께 식사하거나 삶을 나눈 적이 한 번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강단의 가르침과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삶에 확고한 신념을 가져오고 영적인 양식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바르게 인도하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간과하면 절대로 성경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말씀을 배워도 교회로서 그 말씀을 순종해나갈 수 있는 힘을 상실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맞벌이도 해야 하고, 진학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도 참 많습니다. 취업은 어떻습니까? 정말 치열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업무시간은 늘고 해야 할 일도 참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 그 큰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참 무모하고도 미련해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무모하고 미련해보이는 길을 과감하게 헤쳐나가기 보다는 그들이 획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삶을 대놓고 따르지는 않더라도 흉내라도 내보려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외로움에 빠진 교회는 그 메마름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소비자 중심의 교회가 되어 성도들에게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을 추구하기도 하고 오직 그 메마름을 채우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일단 재미있고 행복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수많은 교회들은 강단에서 성도의 깊은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생수 대신 그들에게 시원한 느낌과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탄산음료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을 겪는 성도들의 본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주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낼 수 있는 반석까지 흔들어버리는 무서운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에 빠진 교회, 어떻게 그 외로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다음 시간에 그 해답을 찾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