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수많은 과거형 동사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while we were living in the flesh) 죄가 육체 가운데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5절). 오늘 우리는 오랜만에 현재형 동사를 만납니다. 흥미롭게도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I am of the flesh, sold under sin)라는 14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에 있을 때”가 과거(were)였는데 바울은 현재(am) “육신에 속하였다”고 말합니다. 자 그럼 관찰 및 해석으로 본문의 의미를 알아내 봅시다.

이 칼럼 시리즈는 계속해서 성경의 바른 해석 방법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처음부터 살펴본 관찰과 해석의 원리에 따라 로마서 7장과 8장을 다루고 있는 중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원리들을 함께 배울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로마서 7:14)

기본적인 관찰입니다
1. 한글성경에는 뚜렷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은 “For”로 시작합니다. 앞에 나오는 내용과의 연결을 보여줍니다.

2. 핵심적인 접속사 “그러나”가 나옵니다(“~알거니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죠). “그러나”(But)는 분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3. “우리가~알거니와”는 바울이 그동안 계속 이야기 한 내용에 대하여 독자에게 “우리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지?”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이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12절)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의 시작을 “For”라는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뜻인데 13절에 “선한 것” 혹은 “계명”이 나를 ‘죽게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의 근거로 14절의 초반 부분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신령한 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이죠.

4. “신령하다”는 형용사는 영어로 spiritual인데 “그러나” 이후에 등장하는 “육신”(flesh)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대조는 7장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7장의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mind)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flesh)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5. 가장 중요한 동사 에이미(am)가 쓰였습니다. 현재형입니다. 오랜만에 현재형이 등장했지요? 가끔 동사가 없지만 동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는 분명하게 현재형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육신에 속하였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육신에 속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6. “육신에 속하여” 생긴 결과가 바로 “죄 아래에 팔렸도다”입니다. “죄 아래 팔렸다”는 말의 의미는 그 다음 이어지는 구절들이 더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다만 “팔리다”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내 입장에서는 팔렸지만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를 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가 나를 샀다’고 말할 수 있죠. 로마서 6장에 보면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6:20)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인은 종을 샀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팔린 존재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For I do not understand my own actions)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For I do not do what I want, but I do the very thing I hate)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Now if I do what I do not want, I agree with the law, that it is good)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So now it is no longer I who do it, but sin that dwells within me)

사용된 모든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성경을 참고로 적어놓았습니다.

관찰해봅시다.
1. “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14절과 17절에 동시에 에고(“나”)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인칭 동사와 더불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강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 곧 나는”이라고 말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서를 기록하는 현재 시점에서의 모습입니다(모두 현재형 동사). 그래서 이 본문을 바울이 거듭나기 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 15절은 두 문장 모두 “For”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바로 앞에 14절에 나왔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의 근거가 되는 부분입니다. ‘죄가 나를 샀고 나는 죄의 종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대답이 15절입니다.

3.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라는 말은 바로 이어서 “곧”(for) 이후의 말씀으로 설명이 됩니다. 즉 바울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니 도대체 “내가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도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럴때가 있습니다. ‘절대로 이 말만큼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는데 갈등 상황 속에서 격한 말들을 주고 받다 보면 내가 안하기로 다짐한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러한 말과 행동이 내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4. 16절은 조건이 등장합니다(“만일”).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울은 이미 15절에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16절의 조건인 “만일”이 이미 사실인 것이 되죠. 그런의미에서 if보다는 since가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레온 모리스라는 학자는 필라신약주석에서 “if”를 “if, as is the case”라고 설명했습니다. 가정된 조건이 이미 성립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용된 표현도 비슷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I do not do what I want)

“만일(if)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I do what I do not want)

5. 조건은 이미 성립되었고, 그렇다면 그것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왜 원하지 않는 그것을 할까요? 바울은 먼저 “율법에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추가적인 설명으로는 “율법이 선한 것”에 “동의” 혹은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율법의 기준에 동의합니다. 과거에는 모든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지만(그래서 앞에서 계명이 없을때 ‘나는 살았다’고 말했죠) 이제 그는 온전하고 거룩하고 선한 율법에 온전히 동의하여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맞고 나의 이 행동은 그것에 비추어 틀렸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6. 17절의 시작은 “But now”혹은 “so now”입니다. 현재를 강조하는 “now”가 등장합니다. 조건절이 성립하고 나서 그러면 이제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할 차례였는데 먼저는 자기는 율법의 선한 것에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자기로 하여금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지 설명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등장한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한다”가 내용의 흐름을 잠시 막았던 것을 “이제는”(but now)이 받아서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말합니다.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내가 율법에 근거하여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행하는 것도 아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한 것이다.

2) 내가 율법에 근거하여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행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원하여 내가 그것을 한 것이다.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와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만일 1)번이라면 이원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화내고 욕을 하고 죄를 지어도 내가 한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 속에 있는 죄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로도 그것은 사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한 것이라는 것이죠. 초대교회 시대 영지주의자들이 기본적으로 이런 이원론에 빠졌습니다. ‘육체로 짓는 죄는 내가 짓는 죄가 아니다 나는 영으로 거룩한 죄 없는 존재다’라고 가르치는 영지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원론은 결국 완전성화주의를 낳기도 합니다. 육체로 죄를 짓더라도 영으로는 완전성화를 이룬 존재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2)번은 바울이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행한 그 죄가 사실 자기가 진실로 원해서 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내 속에 있는 죄가 원해서 그것을 내가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와 내 속의 죄를 억지로 구분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원하는 그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동안 15절부터 바울이 썼던 표현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15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16절). 항상 들어갔던 동사는 바로 “원하다”(want)입니다. 뗄로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정 옳다고 여기는 것,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선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원치 않는 것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존재입니다. 원치 않는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처럼 말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말은 죄가 내 밖에 있지 않고 속에 있다는 것과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 아니라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거하다”는 앞으로도 계속 등장하는 동사입니다(롬 7:18, 20; 8:9, 11).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는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13절에서는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한 장소에 함께 머무르는 것, 상주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인이 겪는 죄의 문제에 대하여 밖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이웃이, 아내가, 남편이, 가족이, 혹은 세상이, 마귀가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17절에 말합니다. “이유는 내 속에 거하는 죄다.” 이유는 내 안에 있습니다. 모든 죄는 설령 어떤 환경이나 사람이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내 속에 거하고 있는 죄의 욕구로 인해 그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환경에서 같은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예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자, 여기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죄의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바울은 현재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렸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 자신이 동의하는 율법의 선한 것대로 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것, 미워하는 그것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그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죄에 팔린바 된 종 같이 느껴졌습니다. 왜 자신이 그런 결정을 하고 그런 선하지 못한 일을 하는지 원인을 생각해보니 자기 안에 존재하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를 범한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대로 살아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거주하고 있는 죄가 원하는 대로 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18~25절 말씀을 계속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교리적인 가르침이 있다면 바로 죄의 본질적 문제는 우리 밖에서가 아닌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또한 억지로 나와 내 속의 “옛 자아” 혹은 “옛 사람”을 나누지 말라는 것.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죄가 한 것이다”라는 구분은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라든지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옛자아다’라는 말은 교리적으로 로마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계속된 설명을 통해 다음시간에 그리스도인과 죄에 대해 살패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예시를 통해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잘 찾으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