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인가?” “율법이 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지난번 칼럼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7장 7~8절의 말씀을 가지고 율법의 역할에 대한 로마서의 가르침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 예시를 통하여 성경해석의 과정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기본적인 관찰을 해보겠습니다.
1.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로마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질문이 나오고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이어집니다(예: 4:1, 10; 6:1, 15). 헬라시대 교육방식 중 문답식이 있었는데 유대인 랍비들도 주로 사용했던 방법이었습니다. 묻고 그에대한 대답을 하는 것으로 교육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로부터 위와 같은 질문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바울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정리하면서 율법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게 하려고 자문자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라는 주어가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2. “율법이 죄냐?”라는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지난 번 저희가 도식화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죄의 욕망이 지체 가운데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과정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by the law)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충분히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3. 대답이 나옵니다. 아주 명백하고 분명한 대답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쉬운성경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표현합니다. 문맥을 고려해보면 율법의 역할과 죄의 관계에 대하여 14절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결론은 12절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4. 그리고 나서 7절의 나머지 부분은 율법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장 구조를 다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이 죄냐?(질문) 그럴 수 없느니라(대답)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율법의 역할)
–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예시)

5. 7-8절에서 주로 사용되는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5절),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5절),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6절). 7장 마지막까지 종종 “우리”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나”라는 1인칭 단수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죠?

6. 사용된 동사들은 거의 과거형으로 보입니다.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I had not known sin),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I had not known lust), “기회를 타서”(taking occasion),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wrought in me all manner of concupiscence). 헬라어로 들어가면 aorist 시제를 갖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단 한 차례 pluperfect가 사용되었구요).

7. “그러나”는 아주 중요한 접속사입니다. 기억해두세요.

8. 마지막으로 반복되는 단어를 살펴보면, “율법”이 4번 나옵니다. 영어로는 law라고 했죠. “죄”(sin)가 또 4번 나옵니다. “말미암아”가 두 번, 그리고 “알지 못하였다”가 두 번 나옵니다. “탐심”도 세 번 정도 나오네요. 율법과 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탐심은 그에 대한 예시로 주어진 것 같습니다.

 

7절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특별히 율법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1.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율법의 역할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뒤에 이어지는 예시를 봅시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2. 문맥을 살펴봅시다. 바울이 이것에 대해 더 명확하게 말한 부분이 있나 찾아봅시다. 로마서 3장을 보면 이런 말이 있군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3. 바울이 예로 들었던 “탐심”을 생각해보면, 무언가 탐하는 마음(탐심)이 내 안에 일어나고 있어도 율법이 그것이 바로 “탐심”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생각해보면 내 안에 어떤 병의 증상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의사가 ‘그건 바로 어떤 병입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병을 가지고 있어도 병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죠.

4. 논리적으로 율법은 결국 질병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병이구나,’ ‘잘못된 것이구나,’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이구나’ 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반대로 생각해서 율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8절을 볼까요?

1. 탐심에 대한 예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2. 율법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나서 이어지는 “그러나”는 우리의 의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율법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죄를 짓게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대답은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입니다.

3. 주어는 “죄”입니다. “죄”가 하는 일이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는 것이죠. 유사한 표현을 지난주에 본 것 같지 않나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5절). “내 속에서”와 “우리 지체 중에서”는 참 비슷한 표현입니다.

4. 야고보서 말씀도 기억이 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사망을 낳는 것”도 유사한 표현 같습니다.

5. “계명으로 말미암아”(by the commandment)라는 표현은 특이합니다. 5절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by the law)가 쓰였었죠.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다르긴 하지만 죄를 범하는 과정을 묘사할때 동일하게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은 흥미롭습니다. 율법이 뭔가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6. 우리는 앞서 율법의 역할을 “죄를 알게 해주는 것” 혹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혹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은 함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7. 바울의 설명은 이어집니다. “이는”(for). 추가 설명을 하겠다는 것이죠. “계명으로 말미암아”의 의미가 무엇인지 힌트를 줄 것 같습니다.

8.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조금더 유한 표현으로 쉬운성경은 “율법이 없다면,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면(죄를 알게하고 깨닫게 하는 역할), 여기서 율법이 없다면 죄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이기 보다는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이 MRI기계처럼 몸 속을 투시해서 보여준다면 몸의 문제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다면(MRI가 없다면) 몸에 문제가 있어도 알 수 없습니다. 없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문제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8절을 그림으로 표현해볼까요?
먼저 율법이 없을 때입니다.

행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무엇이 그러한 열매를 맺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탐심이 탐심인줄 모르는 거죠. “율법이 없다면,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무엇이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율법의 역할에 맞게 죄를 알게 해줍니다.

탐심이 죄라는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문제가 죄(혹은 죄의 욕망)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욕망이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율법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율법과 죄의 관계는 이후 구절을 통하여 계속해서 설명되어질 것입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타서”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영어성경은 “taking occasion”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KJV). NASB는 taking opportunity라고 번역했습니다. 11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새번역).

온전한 율법,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는데 죄는 그것을 이용하여 속이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인데요, 그런 예를 우리가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까요? 창세기부터 생각해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분명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동산 중앙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죄는 무엇을 하였지요? 그 계명을 이용하여 속였습니다. “동산 중앙의 실과를 따먹어도 너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그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은 사망을 위한 인류 첫 열매를 맺었습니다.

결국 율법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이 저지른 일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죄의 정욕은 이 분명히 주어진 계명을 거역하고 대항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기회를 엿보다가 이 계명을 이용하여 속이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주체는 죄의 정욕입니다.
계명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죄의 정욕은 계명을 통하여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교묘히 기회를 엿보다가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계명을 대항하도록 만듭니다.
계명은 이것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참고 롬 7:11, 13).

궁금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왔을때 어떤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는지 말입니다.
그러려면 8장까지 가야합니다. 그전에 우리는 율법과 죄의 관계, 그리고 바울의 내적갈등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더 살펴봐야 합니다.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