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장 1절)

많은 사람이 ‘성경에는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20장에 등장하는 십계명만 살펴봐도 “말라”가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열 가지 중에 여덟 개가 “말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왜 이렇게 규제하려고 하실까요. 답답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을까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 그들이 교회 나오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교회에 가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많아서”라고 말합니다. 술도 못 먹고 담배도 피울 수 없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내가 가진 자유를 빼앗기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요 8:32).

뱀은 참 간교한 짐승이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밀 까부르듯 아주 쉽게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으며(눅 22:31)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아 다녔습니다(벧전 5:8). 창세기 3장 1절에 마귀가 했던 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마귀는 “너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하나만 예외라며?”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먹도록 허락하신 수많은 열매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에 집중하게 하였습니다. 마귀는 그 하나의 자유가 억제된 것은 결국 모든 나무를 못 먹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스프로울은 이 질문을 통해 마귀는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에 한 가지 제약을 두셨다면 그것은 모든 자유를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93p).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유롭게 허락하신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뱀의 말이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단 하나의 열매를 금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니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어 만물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동산의 모든 실과를 자유롭게 취할 수 있게 하셨는데 단 하나의 “말라” 때문에 하나님을 무자비하고 불공평한 분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많은 축복들에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 하지 않는 것은 허망한 생각으로 마음을 미련하게 하고 어둡게 만드는 것을 봅니다.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지?”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바라보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금하신 것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스프로울은 어린아이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열 가지 일을 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 중의 아홉 가지는 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지만 한 가지는 금지할 경우, 어린아이는 한결같이 “부모님은 저에게 아무 일도 못 하게 하신다”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 말라는 게 왜 이리 많아요?”라고 불평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많은 은혜의 방편들과 축복의 명령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말라”가 가득 차 있어 보였던 십계명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와 온 율법의 강령을 두 가지로 줄인다면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입니다(마 22:37-40).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백성의 행복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이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의 첫 소절을 보십시오(엡 1:3-6).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누구를 찬송합니까?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입니다.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말합니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복을 누리기 위한 대가는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입니다.

이 귀한 복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헤아려 본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지 말라”에 주목하게 할까요? 왜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의 무궁한 크기에 압도되지 못하고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신 울타리에만 민감하게 반응할까요?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하기를 바라시는 일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우리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율법이 공정하지 않다는 패역한 생각을 품고 있다”(95p).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마귀는 공격합니다(94p).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하지 말라”가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보이십니까?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세워두신 울타리가 불편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 말라”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죄에 가까이 다가온 상태입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깔려있습니다. 그 생각의 가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한 의문으로 뻗어 나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죄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마귀의 여러 가지 강력한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믿음으로 모두 이기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지 않아도, 뛰어내려 천사에게 보호받는 것을 체험하지 않아도, 모든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 육과 영의 죽음을 맛봐야 하는 하나님의 길보다 마귀가 제시하는 길이 쉬워 보여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잡히시기 직전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분명한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복음 17장 4절). 그분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아버지께 감사하셨습니다.

“하지 말라”가 많아 보인다면 감사할 것이 얼마나 더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받은 복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불신을 걷어내십시오. 공평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마귀가 당신에게 “이건 너무하지 않아?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정말 하나님이 이걸 다 하지 말라고 하신단 말이야?”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로 나에게 아낌 없이 주신 분이셔, 그런 그분이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야.” “말라”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게 만드는 제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