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천지를 육일 동안 창조하셨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 근거를 묻는다면 아마도 창세기 1장의 기록을 언급할 것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창 1:5, 8, 13, 19, 23, 31). 하나님이 직접 전해주신 출애굽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 20:11).

성경은 분명히 육일 창조를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 과학자들, 신자들이 육일 창조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육일 창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극단적인 문자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비아냥 거리면서 그렇다면 욥기에 나오는 우박창고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고 조롱하기도 합니다(욥 38:22).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문자주의를 피하라는 경고를 많이 받았습니다. 문자주의란 성경에 기록된 글자 그대로를 글의 성격과 문맥, 장르와 문학장치를 파괴하면서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주장과 고집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Literalism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잠언 23장 13절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아이를 아무리 심하게 때려도 죽지 않는다고 믿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의 장르를 무시한 경우죠.

그러나 우리는 문자주의(Literalism)와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기록된 것이므로 문자적 특징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역사적 기술은 역사적 기술로, 시는 시로, 예언서는 예언서의 특징대로 해석을 해야 하며 여러 가지 문학장치(수사법, 비유, 대조, 은유, 과장, 축소, 일반화 등)에 맞게 해석을 합니다. 우리가 보통 책을 읽을 때 그러하듯 동일한 원리에 따라 해석을 합니다. 또한 성경은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통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가리켜 역사적-문법적 해석 방법 혹은 역사적-문자적 해석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육일 창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문자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창세기의 기록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받아들이고 사실적 기술을 위해 사용된 문장과 글의 특징에 따라 육일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 “지독한 문자주의”라고 비난하기 원한다면 반대로 왜 그것이 문자주의인지 증명해내야 할것입니다.

왜 창세기를 시나 상징적 혹은 신화적 문학이라는 장르로 봐야하는지, 왜 창세기의 기록을 사실적 기술이 아닌 비유나 상징의 표현으로 봐야하는지, 시편기자들이나 구약과 신약 저자들이 이 사건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밝히신 육일 창조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조금 놀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문자주의와 문자적 해석을 구분하지 않고 성경의 장르와 표현의 특징을 인정하면서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서도 “문자주의”라고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견해나 과학적, 철학적 정보와 성경 해석이 다른 소리를 낼때 더욱 더 남용되는 것 같았습니다. 육일창조 역시 성경해석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진화론과 맞물려 거론될때 “문자주의”라는 비난이 붉어졌구요.

결국 “문자적 해석”을 “문자주의”라고 비난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성경해석의 차이 보다는 성경의 권위나 무오성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8년 시카고에서 약 300여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제임스 보이스, 제임스 패커, 프란시스 쉐퍼, R. C. 스프로울, 존 맥아더 등)이 동의한 성경의 권위, 무오성, 충분성에 대한 협약(시카고 협약: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을 보면 무오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동의문을 볼 수 있습니다.

제6조: 우리는 성경 전부와 각 부분은, 원본의 바로 그 단어들에 이르기까지, 신적인 감동에 의해서 주어졌음을 주장한다.
성경의 영감은 부분들이 없이도 전체에 대하여, 혹은 전체가 아니라 어떤 부분들에 대하여 정당하게 단언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제12조: 우리는 성경은 거짓과 사기와 속임이 없는 전체로서 무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의 절대 확실성과 무오성은 역사와 과학의 영역에 있는 주장들은 제외하고, 영적인 주제나 종교적인 주제나 구속적인 주제에만 한정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더구나 지구의 역사에 관한 과학적인 가정들은 창조와 홍수에 관한 성경의 주장을 부결시키는데 쓰여질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참고로 김홍기목사님이 번역하신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출처입니다: http://21church.churchgrowth21.com/chicagostatement.html
영문으로 보시려면: http://www.spurgeon.org/~phil/creeds/chicago.htm)

육일 창조를 “문자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가운데 모세오경이 바벨론 신화를 유대화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데 뭔가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창세기의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죠. 다른 민족의 신화를 가져오거나 그것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혹은 기록 배후에 있는 역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경의 기록 자체의 역사성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주 고대 사람들이 쓴 것이므로 역사나 과학에 대해 무지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러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1978년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동의한 내용을 보십시오. 그들은 영적인 주제나 종교적 주제나 구속적인 주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역사적 주제에도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그대로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모든 성경의 각 부분, 모든 단어들이 쓰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배후에 깔려있는 역사성과 진실성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부분들의 역사성과 진실성도 인정합니다. 물론 역사적 문자적 해석 방법에 따라서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위로 진실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쓰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적 과학적 무지가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른 문학을 베껴서 배후에 어느정도 진리를 담아놓은 허구성 짙은 고대문서를 우리에게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말씀이라고 소개하는 분이 아닙니다. 과학적 역사적인 오류가 있는 말씀을 기록하시고는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문자주의”를 “문자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자적 해석”을 “문자주의”라고 말한다면,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그렇게 비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 방법인 역사적-문자적 성경 해석을 “문자주의”로 오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성경이 증거하는 영감과 무오성에 대해 빈약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고고학적 자료나 과학적 자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힘 없는 책이 아닙니다. 진정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세상이 모두 변해도 말씀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면 경험이나 이론, 정보나 자료로 성경의 진위여부를 가리려 하지말고 성경으로 그것들을 확증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라면 예수께서 성경을 대하셨던 그 모습을 기억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