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을 함께 공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병고침 사역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까지 나오는 병자들만 해도 베드로의 장모(눅 4:38-39), 나병 들린 사람(눅 5:12-16), 중풍병자(5:17-26)가 있었고 누가는 “온갖 병자들”(4:40)을 언급하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때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들었습니다(5:15).
우리는 또한 성령을 통해 “권능”을 받은(행 1:8) 제자들이 예수님과 유사한 치유의 능력을 행하는 것을 봅니다(행 3:1-10). 사도 바울 역시 그러한 능력이 있었지요(행 19:12; 20:7-12).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를 얻은 성도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병을 고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치유집회” 혹은 “치유사역”이라고 불리는 이 사역을 시행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힘으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로” 혹은 “목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이들을 따라다니고 있으며 집회를 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고 고백하여 참석한 무리들을 감동으로 열광하게 만듭니다.
<위: 베니 힌, 아래: 헤븐리터치의 손기철 장로(전 온누리교회)>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와 같은 특징을 보였던 제자들의 능력도 지금의 치유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여준 치유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치유는 항상 예수님이 선포한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병을 고치시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예: 눅 5:14). 병자들을 고치시면서도 사람들이 단지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께 나오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막 1:45).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병을 고치십니다(눅 5:24).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죽은자를 살리십니다(요 11:25).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그들은 주위에 모인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행 3:16). 그리고 공회 앞에서도 병자를 고친 것에 대해(행 4:9) 다른 이름이 아닌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행 4:12).
오늘날의 치유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그것을 강조하는 일에 더 매진하고 있습니다. 병고침 그 자체를 강조합니다. 병고침을 얻기 위해 모이고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으라는 명령이 주어지면 떠납니다. 썩은 이가 다이아몬드로 변한 것이 위대한 것으로 강조되고 썩은 영혼을 새로운 피조물로 바꿔주신 고결한 주의 보혈의 의미는 간과됩니다. 표적의 능력에 흥분합니다. 예수님은 표적이 가리키는 예수를 부인하면서도 계속된 표적을 요구했을때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치유사역을 하면서 항상 헌금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치유하시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영혼의 회개를 요구하신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치유는 회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에는 항상 “그 즉시,” “곧,” “바로” 라는 말이 따라 붙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행 3:7-8). 병자가 서서히 호전되거나 회복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몇 주간의 재활기간을 요구하거나 다시 재발하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조금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아파서 돌아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치유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불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우울증을 앓던 사람이 이제 행복하다고 말하거나 잘 안들린다고 말하던 사람이 이제 아주 잘들린다고 말하는 따위의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병자의 심각한 상태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그 즉시 완전히 달라진 상태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에 가족이 함께 사는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병자의 상태는 이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진 상태였을 것이며 고침을 받고 나서 그들이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치유는 거의 대부분 내가 잘 모르는 환자라고 말하는 사람의 고백에 의존적이며 고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도 대부분 믿음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치유는 실패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치지 못하시고 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핑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에게서 나간 능력은 단 한번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치유집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갈릴리 호수에서 저녁 6시에 대규모 치유집회를 할테니 오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항상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눅 4:43).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무리들이 그분께 나와 병고침을 얻고자 하였기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전하는 말씀의 권세를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에 그리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치유사역은 치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집회를 갖습니다. 오는 사람들을 치유하겠다고 선전을 하고 모이는 사람들도 치유를 맛보기 위해 모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고침을 받으라고 선포하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을 앞으로 불러 세웁니다. 예수님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정확히 아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때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내용을 들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병자를 고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42)
예수님은 아버지께 병자를 고쳐달라고 구하셨고, 아버지는 항상 그 말씀에 응답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둘러선 무리들(물론 환자도 포함하겠죠)이 그 능력을 보이신 이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 함입니다. 요한이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 또한 그러했습니다(요 20:31).
오늘날 그 누가 하나님께 구하면 다 고쳐준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실한 주의 종들이 병으로 죽는 것을 많이 봅니다. 어떤 경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데려가는 것을 원하시기도 합니다. 우리 눈 앞에 병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구하면 항상 내 말을 들으신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치유는 탁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셨고 구하시는 것을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항상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치유가 정말 예수님께로부터 왔다면 그 치유는 위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먼저 치유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회복을 필요로 하거나 재활을 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재발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해야 하며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가 없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사람을 만나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친구들과 바다에서 놀다가 다이빙사고가 나서 목 아래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사고직후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고통가운데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녀를 더 절망으로 몰고간 사람들이 치유사역자라고 말하는 목사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침을 받는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자책감과 자신만 고침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더 큰 원망이 그녀를 더욱 더 괴롭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마침내 받은 치유는 불구의 몸에서부터가 아닌 마음의 치유였습니다. 그녀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허락한 이 특별한 환경 속에서만 그분께 영광돌릴 수 있는 일들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기쁨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두신 특별한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병을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고쳐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능력의 하나님께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간구하면 어떤 병이든 내가 원하는 바로 이 시간에 기도를 통해 나을 수 있다고 광고하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 아닙니까? 병자들을 더 절망으로 몰아넣는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