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계적 영감설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기계적 영감설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관점은 성경의 모든 글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을 인간 저자가 받아적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종종 드는 예시로는 아주 유명한 작가가 눈이 멀어서 딸에게 작품의 내용을 불러주고 딸이 그대로 받아적었다면 그 글은 작가의 작품이지 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불러주셨고 인간 저자는 받아적기만 했으니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죠. 기계적 영감설에 따르면 성경은 온전한 하나님만의 창작물입니다. 인간 저자는 그분이 사용한 펜에 불과하지요.
존 맥아더 목사님은 <성경, 이렇게 믿어라, 원제: How to get the most from God’s word>에서 기계적 영감설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영감은 기계적인 받아쓰기가 아니다. 성경 기자들은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아무런 생각없이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은 진리를 그대로 받아쓰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사람들을 사용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마치 비처럼 우리에게 떨어트려 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펼 때 우리는 거기에서 인격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자마다 독특한 문체를 보여 준다. 사용된 언어와 어휘들도 다양하다. 성경의 여러 책들을 읽을 때, 우리는 당시 기자들이 경험했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44p).
우리는 진정 성경에서 저자의 분명한 의도가 담겨있는 표현을 발견합니다. 예로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1-4)
분명한 편지의 대상인 데오빌로가 있고, 그에게 전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분명하며, 그 목적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난 이 표현도 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바울의 개인적인 감사의 표현도 서신서에 아주 잘 드러나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바울은 또한 이렇게도 말하였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살후 3:17)
이렇게 각 성경마다 저자가 기록한 시대의 배경과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기록 목적이 있고, 대상이 주어진 것도 있습니다. 저자의 감정이 들어가 있고 문체와 인격이 묻어납니다. 인간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용만 하신 로봇이 아닙니다. 환상을 보거나 몽환적인 상태에서 기록한 것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바울이 쓴 서신서들에 대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섰고”라고 분명하게 바울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을 보여줍니다(벧후 3:15).
자연영감설과 동력영감설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과소평가합니다. 순수 인간만의 창조물이거나 약간의 하나님, 약간의 인간의 창작물로 여깁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관점입니다. 반대로 기계적 영감설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극단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또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말씀을 기록한 저자들의 인격과 문체, 동기와 목적까지 무시하고 그들을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받아적기만 한 사람들로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 성경적인 영감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다음 칼럼에서 마지막으로 그 해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기계적 영감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두 가지 성경해석의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극단적인 문자주의적 해석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극소화했기 때문에,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정상적인 인간의 글이 가지고 있는 규칙과 법칙, 장르와 문학장치 등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도 상관없다고 보는 해석방법입니다.
둘째도 비슷한데, 전율신학으로 불리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의 과정이 기계적 영감인것처럼 성경 해석의 과정도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넣어주시는 생각으로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류입니다.
이 두가지 오류는 본문을 읽으면서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성경의 참 의미이자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각으로 보고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성경의 의미를 자신이 이해한대로(혹은 “하나님이 내려주신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본래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이라는 계시와 다를 때, 우리는 이 하나님이 어떻게 영원히 진실하신 분이시며 거짓이 없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최초에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기록하신 성경을 오늘날 우리에게 조명해주시면서 다른 의미로 비춰주실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계시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분별한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주신 성경의 본래 의미를 벗어난 다른 의미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말씀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심각한 신성모독의 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해석의 잘못된 습관은 기계적 영감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됩니다. 때로는 이 영감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신비주의에 심취한 잘못된 성령론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경우도 영감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영감은 독자의 영감이 아닙니다.
이렇게 성경의 영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의 영감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